창세기 강해(39)-우리의 합환채는 무엇인가? (창세기 30:1-15)

창세기 강해(39)-우리의 합환채는 무엇인가? (창세기 30:1-15)

이 내용은 송태근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
39번째, 우리의 합환채는 무엇인가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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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환채, 인간의 방법과 하나님의 주권

합환채는 오늘식으로 말하자면 강장제이자 최음제라고 할 수 있어요. 당시에는 성욕과 생식 능력을 증진시키는 아주 유명한 식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 합환채의 뿌리 모양은 특이하게도 사람 둘이 합쳐진 것처럼 보였다고 전해져요. 아마 르우벤이 들에 나갔다가 우연히 발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어머니 레아에게 가져다주었죠.

그런데 이 합환채를 두고 집안에 갈등이 생깁니다. 시비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동생 라헬이었어요. 이 장면은 창세기 29장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두 여인, 라헬과 레아의 갈등 구조를 아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름에 담긴 어머니의 마음

레아와 라헬의 성격과 내면은, 사실 자녀들에게 붙여 준 이름만 보아도 분명히 드러나요.

레아가 낳은 첫째 아들은 르우벤입니다. 이 이름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어요.

“보라, 아들이라.”

둘째 시므온은

“하나님이 들으셨다.”

셋째 레위는

“연합하다.”

이 이름들을 차분히 보면, 무엇이 느껴질까요? 레아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소망은 단 하나, 남편 야곱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갈망이었어요. 오죽하면 셋째 아들의 이름을 ‘연합’이라고 지었을까요. 남편과 마음이 이어지기를 바랐던 간절함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야곱이 본래 사랑했던 여인은 라헬이었습니다. 레아는 말하자면 ‘플러스 원’이었고, 그 사실은 레아의 삶 전체를 늘 쓸쓸하게 만들었어요. 밥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인생이었죠.

넷째 아들을 낳고 레아는 그의 이름을 유다라 짓습니다.

“찬송하라, 하나님.”

이 시점에서 자녀 수는 4대 0입니다. 그런데도 레아는 마침내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립니다. 남편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하나님을 찬송함으로 견뎌낸 거예요.



라헬의 방식, 경쟁과 억울함

반면 라헬은 여전히 아이를 낳지 못합니다. 그래서 고대 사회의 관습에 따라 자신의 여종 빌하를 야곱에게 들여보내죠.

“그 여종을 통해 낳은 생명을 내 무릎 위에 앉히겠다.”

이렇게 태어난 다섯째 아들의 이름은 단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억울함을 푸셨다.”

여섯째 납달리는

“내가 경쟁하여 이겼다.”

이름부터가 다릅니다. 라헬의 이름에는 늘 경쟁, 억울함, 승부가 담겨 있어요.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는, 언니 레아와의 비교 속에서 자신을 증명하려는 마음이 더 강하게 드러납니다.

레아 역시 경쟁에 휩쓸립니다. 이번에는 레아가 자신의 여종 실바를 들여보내죠. 일곱째 갓은

“복되도다.”

여덟째 아셀은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레아 계열의 이름에는 감사와 넉넉함이 흐르고, 라헬 계열의 이름에는 다툼과 억울함이 흐릅니다. 이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합환채 인간의 노력

이제 합환채 사건이 등장합니다.

“밀 거둘 때에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창세기 30장 14절)

여기서 ‘청구한다’는 말은 매우 점잖은 번역입니다. 실제로는 거의 강제로 빼앗으려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인생이 그렇죠.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늘 남이 가지고 있어요.

레아는 쉽게 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죠.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창세기 30장 15절)

결국 거래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
(창세기 30장 15절)

라헬은 합환채를 얻기 위해 남편을 양보하고, 레아는 합환채보다 남편을 택합니다. 아이러니한 장면이에요.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라헬의 내면은 이미 극한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창세기 30장 1절)

이 말은 단순한 푸념이 아닙니다. 거의 폭발 직전의 절규예요. 야곱은 이때 처음으로 분노합니다.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창세기 30장 2절)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고백이었어요. 이 말은 너무 아프지만, 진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신지라

라헬은 끝까지 인간의 방법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대리모, 경쟁, 합환채까지 동원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어요. 합환채를 얻은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오히려 레아가 계속해서 아이를 낳습니다.

마침내 전환점이 옵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창세기 30장 22절)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합환채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억이 태를 열었습니다.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창세기 30장 23절)

요셉이라는 이름의 뜻은

“더하다.”

하나님이 더하셨다는 고백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에서 사랑받지 못했던 레아는 조상의 묘지에 안장됩니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 유다를 통해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반면 라헬은 사랑받았지만, 길에서 베냐민을 낳다 죽습니다.

그러나 이 두 여인의 경쟁과 갈등은 결국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기초가 됩니다. 서로 다른 배에서 태어난 형제들이 요셉을 살리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계속 이어집니다.



다툼을 넘어 일하시는 하나님

이 이야기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허영으로 하든, 다툼으로 하든,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사람은 늘 묻습니다.
이게 나한테 이익이냐 손해냐, 내 편이냐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은 묻지 않으세요.
그리스도가 드러나는가, 그것 하나만 보십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앞에서 물었던 질문,

“너는 우리 편이냐, 대적의 편이냐?”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이제 왔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편을 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편으로 부르시는 분입니다.



잃으면 잃으리라

야곱은 인생 말미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잃으면 잃으리라.”

이 고백은 인생의 중심추가 하나님께 옮겨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이 남아 계시면 된다는 고백이죠.



행복한 자로다

인간의 못남, 경쟁, 얍삽함까지도 하나님은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해 언약을 성취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을 이렇게 부릅니다.

“행복한 자로다.”

오늘 우리의 삶이 엉켜 있고, 억울하고, 이해되지 않아도 괜찮아요.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이 시선을 붙드는 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결국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합니다.

어두운 밤을 지나 새 아침을 맞듯이,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그 자리로 부르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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