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14)-방주로 들어가라 (창세기 7:11-16)


창세기강해(14)-방주로 들어가라 (창세기 7:11-16)

이 내용은 송태근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 중
14번째, 방주로 들어가라 라는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 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더 이상 ‘고쳐 쓸 수 없는’ 하나님의 결정

노아의 홍수 사건은 단순한 자연재해의 기록이 아닙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은 더 이상 회복이 어렵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판단의 순간입니다.
말하자면, 고쳐서 쓰거나 재활용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기에, 전면적인 심판이라는 방식 외에는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결정이 바로 홍수 심판이었습니다.

성경 전체를 관통해 보면 홍수, 바다, 물이라는 세 가지 개념은 하나의 묶음으로 등장합니다.
이것들은 언제나 세상, 고난, 혼돈, 그리고 심판을 상징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바다는 자주 등장하지만, 그 바다에서 나오는 존재들—용과 짐승—은 결코 선하지 않습니다.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탄 배는 바다 한가운데서 풍랑을 만납니다.
바다는 늘 고난의 공간입니다.

시편은 인생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영업하는 자들은 여호와의 일을 보며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물에서 보나니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
(시편 107:23–26)

물과 바다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생의 환란과 심판의 무대입니다.
이제 바로 그 심판의 물이 임하기 직전, 성경은 방주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합니다.



방주 ‘테바’

방주는 히브리어로 ‘테바’라고 불립니다.
이 단어는 성경 전체에서 단 두 번만 등장합니다.

한 번은 창세기, 노아의 방주에서이고
또 한 번은 출애굽기, 모세가 담긴 갈대상자에서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이런 장면이 펼쳐집니다.
히브리 남자아이는 모두 죽이라는 왕의 명령 아래, 모세의 어머니는 아이를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때 그녀는 결단합니다. 갈대 상자를 만들고, 역청을 발라 물이 스며들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그 상자에 넣어 나일강에 띄웁니다.

이 갈대상자가 바로 ‘테바’, 노아의 방주와 같은 단어입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더 이상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외통수에 몰린 인생, 손에 쥔 방법이 전혀 없는 순간.
그때 그녀는 아이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물 위에 띄웁니다.

그래서 ‘모세’라는 이름의 뜻은 역설적으로 “물에서 건짐을 받은 자”입니다.



왜 방주 이야기에 모세가 등장하는가

이쯤에서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방주 이야기인데, 왜 자꾸 모세 이야기를 하는 걸까?”

이유는 분명합니다.
방주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모세의 역할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테바’라는 단어가 노아와 모세에게만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이 둘 사이에 해석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훗날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고,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한 책을 기록합니다.
그 책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어다”
(신명기 18:15)

여기서 “나”는 누구입니까?
이 글을 쓰고 있는 모세 자신입니다.

즉, 모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와 같은 선지자가 장차 너희 형제 중에서 일어날 것이다.”

이 말씀은 신약에서 그대로 받아집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요한복음 6:14)

모세가 가리킨 ‘나와 같은 선지자’,
신약이 증언하는 그 인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방주는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이제 그림이 선명해집니다.
방주는 단순한 배가 아니라,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상징입니다.

바울은 홍해 사건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고린도전서 10:1–2)

놀랍게도 바울은 홍해를 건넌 사건을 ‘세례’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표현이 등장합니다.
“모세를 따라”가 아니라, “모세에게 속하여”입니다.

이 말은 곧,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께 속하여,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결국 방주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온 세상이 물로 덮이는 심판 가운데,
살 길은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방주 안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함께 태우신 이유

노아의 방주를 읽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내게로 데려오며”
(창세기 7:2)

왜 부정한 짐승까지 방주에 태우셨을까요?
차라리 정결한 것만 남기고, 깨끗이 정화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이 질문 자체가 인간의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노아와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와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창세기 6:18)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내 언약”입니다.
언약은 원래 쌍방 계약이지만, 이 언약은 일방적입니다.
인간은 더 이상 언약을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정한 것까지 방주 안으로 들이십니다.
그 부정한 짐승이 바로 우리 자신을 상징합니다.



정결한 짐승의 죽음, 부정한 자의 생명

홍수가 끝난 뒤, 노아는 제단을 쌓습니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창세기 8:20)

제물로 드려진 것은 정결한 짐승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를 대신해 죽었을까요?
방주 안에 함께 있었던 부정한 것들을 대신해서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구조입니다.

예수님은 부정한 자의 관에 손을 대셨고,
혈루증 여인의 손길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분이 부정해짐으로, 우리는 정결해졌습니다.

정결한 어린양의 죽음으로
심판받아 마땅한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문이 닫힌 후의 일주일, 그리고 노아의 삶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창세기 7:10)

문이 닫혔습니다.
밖은 여전히 맑고 평온합니다.
방주 안에는 노아와 가족만 앉아 있습니다.

그 일주일을 상상해 보십시오.
“만약 비가 오지 않는다면?”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의 조롱과 손가락질 속에서,
그는 의를 전파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베드로후서 2:5)

노아에게 의를 전파한다는 것은
말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자리에서 방주를 짓는 삶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노아의 부르심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자리로 보냄을 받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선교지입니다.
직업이 무엇이든, 그 자리는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입니다.

때로 사람들은 묻습니다.
“왜 저렇게 갑갑하게 살아?”
그 질문을 받는 것이 정상입니다.

기독교는 잘 먹고 잘 사는 약속이 아닙니다.
삶 전체를 걸어야 하는 부르심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자리에서
방주를 예비하는 일상으로 나아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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