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31)-아브라함의 시험(창세기 22:1-12)

“그 일 후에”
오늘 본문은 많은 성도들이 잘 알고 있고, 또 이미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본문이에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늘 오늘 새롭습니다.
창세기 22장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창 22:1)
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먼저 붙들어야 해요.
첫째, “그 일 후에”란 어떤 사건 이후를 말하는가 하는 문제이고,
둘째,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시험’은 어떤 종류의 시험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의 자리
창세기 12장부터 아브라함의 여정을 따라가 보면, 그의 인생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어요.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고, 아내를 누이라 속이고, 약속을 기다리지 못해 이스마엘을 낳는 수많은 실패와 넘어짐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버리지 않으셨고, 끝까지 기다리셨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약속대로 이삭을 주셨어요.
이삭의 탄생은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믿음이 빚어낸 결과라기보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웃음 없던 인생에 하나님이 직접 웃음을 주신 사건이었지요.
그리고 바로 그 일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십니다.
가나안 땅에서 흔들리는 신앙의 균형
이 시점의 아브라함은 이미 가나안 땅에 정착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문제는 가나안의 종교 문화였어요. 그곳은 종교적 열광주의가 만연한 땅이었고, 심지어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극단적인 우상숭배가 실제로 행해지던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 문화 한가운데에서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했을 것입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 앞에 충분한가?”
“이 은혜에 내가 뭔가 보답해야 하는 건 아닐까?”
사람은 늘 면목이 없을 때 무리수를 두기 쉽습니다.
그 무리수가 신앙과 결합되면, 그것은 곧 종교적 광기로 변질됩니다.
아브라함의 혼란은 불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신앙인의 혼란이었습니다.
이 혼란의 지점에서 하나님이 시험하십니다.
검증이 아닌 계시
이 시험은 아브라함을 넘어뜨리기 위한 시험이 아니에요.
결론을 보면 분명해집니다. 이 시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에 자신을 다 드러내지 않으세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역사와 시간 속에서 조금씩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창세기 22장은 그 계시의 절정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은 가나안 종교의 패턴을 빌려 말씀하십니다.
“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을 생각하면, 지금도 쉽게 납득되지 않는 시험이에요.
말없이 길을 떠나는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창 22:3)
놀라운 것은, 이 과정 어디에도 사라와 상의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이에요.
만약 상의했다면, 이 길은 시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삼 일 길을 걸어갑니다.
그 길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을까요?
아버지의 가슴에는 말할 수 없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오리라”는 믿음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창 22:5)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우리가 돌아오리라.”
이것은 말실수가 아니라, 부활 신앙의 고백입니다.
히브리서는 이 장면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히 11:17)
아브라함은 이미 마음에서 이삭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신뢰였습니다.
나무를 지고 오르는 이삭의 그림자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창 22:6)
여기서 ‘아이’라는 말은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산을 오르며 나무를 질 수 있는 건장한 청년이었어요.
이 장면은 너무도 분명한 예표를 보여줍니다.
나무를 지고 산을 오르는 이삭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창 22:7)
아들의 질문은 아버지의 심장을 꿰뚫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창 22:8)
이 말은 즉흥적인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제의가 아닌, 본능의 순종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창 22:9)
여기에는 제의적 언어가 없습니다.
문학적 동사만 나열됩니다.
쌓고, 벌여 놓고, 결박하고, 올려놓고.
이것은 의식이 아니라 몸부림입니다.
아브라함의 속살이 하나님의 가슴에 그대로 부딪히는 순간이에요.
이미 죽은 아들, 그리고 멈춘 칼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창 22:10)
칼이 들려진 순간, 이삭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결단은 끝났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창 22:11–12)
하나님은 여기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런 신이 아니다.”
하나님의 역설적 계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을 돌려보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위해 내 아들을 내어놓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설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요구하지 않으시지만, 하나님 자신은 그렇게 하십니다.
씨와 성문, 그리고 그리스도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창 22:17)
여기서 ‘씨’는 단수입니다.
이삭을 넘어,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성문은 곧 성 전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나는 양의 문이라” (요 10:7)
그 문을 통해서만 생명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초대
이 본문은 순종을 강요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해되지 않는 명령 앞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지 말라는 초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묻고 싶을 때,
“하나님, 이게 뭡니까?”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그 질문조차 하나님은 밀어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자신의 사랑을 더 깊이 드러내십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가,
그렇게 하나님과 가슴이 맞닿는 기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