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52) 요셉으로 쓰고 십자가로 읽는다 (창세기 41:37-45)

'하나님이'
드디어 요셉은 바로에게서 모든 정권을 위임받아, 실질적으로 애굽 전체를 경영하는 총리가 됩니다. 형식적으로는 바로가 왕이었지만, 실제 행정과 통치는 요셉의 손에 있었습니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서른이었어요. 서른의 나이에 대제국 애굽의 총리가 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는 요셉이 쟁취한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자리였습니다.
무슨 일이든, 어떤 보직이든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면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아요. 서른이 아니라 그보다 더 젊어도 하나님은 세상을 경영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서른의 요셉을 사용하신 하나님이 여든의 모세를 사용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나이를 따지지 않으세요.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인생의 주어가 하나님이냐는 것입니다.
세상은 스펙이 운명을 결정한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존재인가를 묻습니다.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동행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서른의 나이에 애굽의 2인자가 됩니다.
인장 반지와 버금 수레
요셉이 2인자가 되었다는 증거는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인장 반지는 단순한 장신구가 아닙니다. 고대 사회에서 인장 반지는 곧 그 사람 자신을 의미합니다. 왕의 인장을 위임받았다는 것은 ‘이제 너는 나다, 나는 너다’라는 동질성의 선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돌아온 탕자에게 아버지가 반지를 끼워 주는 장면과도 연결됩니다. 그것은 아들의 지위 회복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보좌는 다릅니다. 요셉은 왕이 아니라 총리였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버금 수레는 2인자의 이동 수단입니다. 방금 전까지 감옥에서 죄수들을 섬기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애굽의 2인자가 됩니다. 이보다 더 극적인 인생의 반전이 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반전을 준비하시는 분입니다.
이름, 가정, 정체성의 변화
요셉이 총리가 된 이후, 세 가지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이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 하고 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사브낫바네아는 애굽식 이름으로, ‘생명의 부여자’, 혹은 ‘생명을 지탱하는 자’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셉으로 인해 애굽과 열방이 생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 신학자들은 요셉을 그리스도의 예표로 봅니다.
두 번째 변화는 결혼입니다.
“또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니라”
‘온’은 태양신을 섬기는 도시이고, 아스낫 역시 우상과 관련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셉은 이방 제사장의 사위가 됩니다. 이름도, 가정도 애굽화됩니다.
이 지점에서 요셉을 변질되었다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죄인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요셉의 선택은 변심이 아니라 성육신적 순종이었습니다. 그는 환경을 받아들였지만, 신앙의 중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살리기 위한 준비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되…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요셉은 풍년의 때에 미래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이 준비는 결국 야곱의 가족을 살리는 통로가 됩니다.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이제 다시 이야기의 중심이 요셉에서 야곱으로 이동합니다. 처음부터 이 이야기는 ‘야곱의 족보’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므낫세는 ‘잊어버리다’라는 뜻입니다. 요셉은 지나온 고난의 시간을 잊고 싶었습니다.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에브라임은 ‘창성함’, 곧 갑절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이 두 이름에는 요셉의 현재 상태가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과거는 잊고 싶고, 현재는 넘치도록 은혜롭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설계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전무후무한 기근이 온 천하를 덮습니다. 그러나 이 기근은 파괴가 아니라 만남을 위한 도구였습니다. 이 기근이 없었다면 요셉과 야곱의 재회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인생에도 이해할 수 없는 기근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기근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은 구원의 퍼즐을 맞추고 계십니다.
여전한 편애
야곱은 여전히 베냐민을 편애합니다.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성숙은 인간이 나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은 내가 오늘도 십자가가 필요한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야곱은 끝까지 인간적이었고, 결국 “잃으면 잃으리라”는 고백 앞에서야 내려놓습니다.
결국 십자가
요셉도, 야곱도, 형제들도 모두 완전하지 않습니다. 억울함과 오해, 죄와 거짓말이 얽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는 결국 십자가로 수렴됩니다. 용서와 화해, 그리고 은혜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인생의 문제는 십자가와 맞닿을 때만 의미를 가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고난은 헛된 고생으로 끝납니다. 십자가에서 출발하고 십자가에서 끝나는 인생만이 성공한 인생입니다.
오늘의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든, 그것이 십자가와 만나는 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이야기 안에서 해석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