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29)-하나님의 성실하심(창세기 21:1-12)


창세기 강해(29)-하나님의 성실하심(창세기 21:1-12)

이 내용은 송태근 목사님의 창세기강해중
29번째, 하나님의 성실하심
이란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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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 대로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이삭의 탄생입니다.
창세기 2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창세기 21장 1절)

짧은 구절 안에 같은 표현이 반복됩니다.
“말씀하신 대로.”

2절에서도 다시 등장합니다.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창세기 21장 2절)

사라가 임신한 것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갑자기 바뀐 결과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따라 흐르는 하나님의 시간표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분명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분의 시간표는 늘 말씀을 따라 흐른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도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린도전서 15장 3–4절)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말씀대로 진행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반드시 붙들어야 할 깃발은
환경도, 감정도, 여론도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돌보셨다”

“여호와께서 사라를 돌보셨다”는 표현에는
사실 세 가지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방문하셨다는 뜻입니다.
사라만큼 하나님의 방문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인물은 드뭅니다.

둘째, 하나님이 계산하셨다, 곧 계획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발적으로 일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뜻을 정해 두셨다는 의미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그 계획을 확정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확정하신 일은
“될 수도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미 되어진 일입니다.

하나님께는 시제가 의미가 없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면, 그 즉시 빛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말씀의 권위를 내려놓을 때, 퇴락의 시작

오래전 영국 웨일즈 지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은 한때 부흥의 요람이었고,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가 자랐던 교회가 있던 곳입니다.

그러나 제가 본 현실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교회들은 폐허처럼 방치되어 있었고,
예배당은 간이 주점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때 유럽 교회사 연구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영국과 유럽 교회는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대답은 놀라울 만큼 단순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내려놓은 순간부터
둘째, 그에 따라 다음 세대 교육에 대한 투자가 사라진 순간부터
퇴락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 회복의 해답은 전략이 아니라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시기”라는 표현

창세기 21장 2절에 나오는
“말씀하신 시기”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갈라디아서 4장 4절)

이 시기는 아무 때나 오는 막연한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입니다.

우리 인생과 역사의 초점은
내가 급한지, 상황이 급한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추는 데 있습니다.



이삭, 약속으로 주어진 웃음

이 아이의 이름은 이삭입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의 뜻은 “웃게 하시다”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창세기 21장 5절)

히브리서는 이 상태를
“죽은 몸 같은 데서”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단순히 늙었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적인 가능성이 완전히 끝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능력으로 태어난 아들이 아니라
약속으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삭을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기보다
약속의 자녀라고 부릅니다.



복음을 듣는 자는 함께 웃게된다

사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창세기 21장 6절)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듣는 자”입니다.
무엇을 듣는 자입니까?
죽은 몸 같은 데서 생명이 났다는 소식,
복음입니다.

이삭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예표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자는 모두 웃게 된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처음 행하신 기적이
가나의 혼인잔치였던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복음은 중단된 잔치를 회복시키는 능력입니다.



세상은 이 웃음을 비웃는다

하지만 성경은 곧바로 긴장을 보여줍니다.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창세기 21장 8–9절)

이 “놀린다”는 말은
비웃고 조롱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복음을 비웃습니다.
그 절정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구원의 순간에 세상은 조롱했고, 침 뱉었고, 비웃었습니다.



홀로 싸우시는 하나님

아브라함과 사라의 삶을 돌아보면
그들에게서 믿음의 영웅다운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불완전한 인생에 개입하셔서
불신의 웃음을 신앙의 웃음으로 바꾸십니다.

이 싸움은 인간이 이긴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홀로 이루신 싸움입니다.

성경은 인간 개조의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단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그래서 성경은 언제나
기승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열심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믿음의 조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된 이유는
믿음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을 끝까지 만들어 가신 하나님의 열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은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은혜의 결과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모든 분들이
각자의 가정과 삶의 자리에서
믿음의 조상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잘하려 애쓰기보다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는 싸움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캄캄한 밤을 지나고 있는 인생일수록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간절히 부르짖는 은혜의 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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