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28)-최고의 연주자(창세기 20:1-12)


창세기 강해(28)-최고의 연주자(창세기 20:1-12)

이 글은 송태근 목사님의 창세기강해
28번째, 최고의 연주자
라는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 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창세기강해 바로가기


반복되는 실패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20장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묘하게 낯설지 않은 느낌이 들어요.
“이 장면, 어디서 본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르지요.

맞아요. 이미 우리는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아주 비슷한 사건을 한 번 경험했습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사라를 위험한 상황으로 내몰았던 바로 그 이야기 말이에요.

역사는 반복됩니다.
그리고 거짓말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아요.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성도이면서도, 동시에 계속해서 죄를 짓고 실수하며 이웃을 속이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아내를 사지로 몰아넣는 이 행동은, 인간적으로 보면 참 비열하고 비겁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성경은 왜 이런 부끄러운 이야기를 굳이 기록하고 있을까요?
오늘 이 밤, 우리는 이 본문에서 무엇을 들어야 할까요?



같은 패턴 다른 초점

창세기 12장과 20장은 구조와 사건의 흐름이 매우 비슷합니다.
그러나 가르치려는 초점은 전혀 다릅니다.

12장에서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아브라함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혼이 난 사람은 바로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둡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바로에게도 동시에 메시지를 주시는 장면이었어요.

그때 아브라함은 아직 신앙의 눈금이 아주 희미하던 시기였습니다.
“이게 정말 하나님의 인도인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 맞는가?”
이렇게 왔다 갔다 하던 시기였지요.

그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의 신앙 안에 하나의 굵은 눈금이 새겨집니다.
하나님은 바로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읽는 20장은 다릅니다.
패턴은 비슷하지만, 하나님이 드러내고자 하시는 대상이 달라요.
여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소개하십니다.



선지자라 불린 사람

본문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렇게 부르십니다.

“그는 선지자라” (창세기 20:7)

히브리어로 선지자는 ‘나비’, 곧 불러냄을 받은 자, 구별된 자라는 뜻이에요.
오늘 우리의 언어로 바꾸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내 백성이다.”

그런데 이 호칭이 어울립니까?
아브라함의 행동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자기 생명을 위해 아내를 위험에 내맡긴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평가하려 듭니다.
“이게 성도의 모습이야?”
“이게 선지자야?”

하지만 이 평가를 하고 있는 분이 누구인지가 중요합니다.
이 판단을 내리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랄로 내려간 이유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 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창세기 20:1)

그랄은 먹거리가 풍부하고, 삶의 조건이 좋은 땅이었습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애굽으로 향하는 길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고백이 뒤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창세기 20:11)

아브라함은 이 땅의 영적 상태를 알고도 내려갔습니다.
마치 창세기 13장에서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 갈 때처럼 말이에요.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죄인이며 큰 악인이었더라” (창세기 13:13)

알고 가는 선택,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다시 반복되는 죄.
이게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아비멜렉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자 일이 벌어집니다.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창세기 20:2)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십니다.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창세기 20:3)

상식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야 맞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을 잘 알지도 못하는 아비멜렉에게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재앙을 미리 막으십니다.

아비멜렉의 반응은 놀랍습니다.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창세기 20:4)

그는 즉시 사라를 돌려보냅니다.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만 보면 아비멜렉이 훨씬 나아 보입니다.

우리는 이런 장면을 현실에서도 자주 봅니다.
세상 사람이 오히려 더 정직하고, 더 책임감 있고, 더 균형 잡혀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요.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편들기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비멜렉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창세기 20:7)

이 장면을 읽다 보면 이런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 너무 일방적이신 거 아닙니까?”
“왜 이렇게 무조건 편드십니까?”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납니다.
이해할 수 없는 편들기,
조건 없는 사랑 없이는 구원이 설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삭, 메시아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이 이토록 아브라함을 지키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아브라함을 통해 이삭이 태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삭의 계보를 통해 메시아,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엉망진창 같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을 준비하십니다.
불순종과 연약함과 비열함마저 꿰뚫어
구속사의 길을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우리의 샘플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고,
얼마나 쉽게 자기 생명을 위해 사랑하는 것을 내려놓는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샘플입니다.



망가진 악기로 연주된 최고의 음악

이 설교의 마지막에 소개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독일 쾰른 오페라 극장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최악의 피아노,
망가진 건반,
소리가 나지 않는 악기.

연주자는 분노했고, 연주는 취소될 뻔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 악기로 연주를 했고,
그 밤의 연주는 역사상 최고의 연주로 남았습니다.

조건이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악기가 좋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연주자가 위대했기 때문입니다.



정면 돌파가 아닌, 상면 돌파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언제나 준비된 길, 안전한 길로만 갈 수 없습니다.
두려움과 연약함, 죄 때문에 아브라함처럼 바보 같은 선택을 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정면 돌파가 아니라
상면 돌파입니다.

위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도란 문제를 정리해서 해결하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문제를 들고 서는 행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체제를 아시고
눈물도, 한숨도, 비명도 다 들으십니다.
그리고 어떤 모습이라도 끌어안으셔서
비 오는 밤, 우르릉거리는 소음 속에서도
최고의 연주를 만들어 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밤에도 하나님 앞에 남김없이 쏟아내십시오.
두려움도, 실패도, 부끄러움도 그대로 가지고 나오십시오.

그분은 이미 알고 계시고,
이미 선택하셨고,
이미 끝까지 책임지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가
오늘 이 밤, 우리 모두에게 충만히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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