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07)-여자와 뱀 (창세기 3:1-7)
이 내용은 송태근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 중 "여자와 뱀"이란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1. 히브리어 ‘나하쉬’와 뱀의 상징성
창세기 3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여기서 ‘뱀’은 히브리어 나하쉬(נחש, nachash)로 기록됩니다.
‘간교하다’라는 표현도 원래는 ‘아룸’, 즉 ‘지혜롭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죠. 뱀의 의성어처럼 들린다는 해석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성경이 여기서 뱀을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지혜를 가진 존재, 그러나 그 지혜가 비틀어진 형태로 사용되는 존재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설교자는 이어 뱀의 신체적 특징을 통해 상징적 의미를 짚습니다.
- 턱뼈의 강함: 자기 머리보다 10배 큰 짐승도 삼킬 만큼 강한 구조
- 안쪽으로 굽은 이빨: 한 번 물리면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드는 구조
- 두 갈래 혀: 이중성, 거짓, 분열을 상징
- 감지력을 가진 눈: 감지능력이 뛰어나며 어두운 환경에서도 먹잇감을 포착
- 귀가 없는 구조와 진동 감지: 들음이 아닌 ‘진동’을 느끼는 방식
- 살아 있는 것에만 반응: 죽은 짐승에게는 관심이 없음
이 모든 묘사는 뱀이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속임과 교란의 상징으로 성경에서 활용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2. 애굽 문화 속의 뱀 이해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의 시대, 이 말씀의 ‘원 청중’은 400년 동안 애굽 문화 속에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이 뱀을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연관된 것은 애굽의 왕, 바로의 왕관에 장식된 우라에우스(뱀 문양)였죠. 애굽 사람들은 뱀을 신으로 여기고, 치료와 보호의 상징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의학 문양에는 뱀이 자주 등장합니다.
- 세계보건기구 WHO 문양 중앙의 뱀
- 예전 대한의사협회 로고의 뱀
- 구급차 앰뷸런스의 뱀 문양
두 가지 해석이 존재합니다.
- 모세의 놋뱀 전통이 의학 상징으로 이어졌다는 해석
- 그리스 신화 속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에서 유래했다는 해석
어느 쪽이든 공통점은, 고대 세계에서 뱀은 신적 치유와 연결된 상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문화에 익숙해 있던 이스라엘이 “뱀”이 등장하는 창세기의 본문을 들었을 때, 그들은 자연스럽게 이 상경을 애굽적 시각으로 이해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은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입니다.
3. 뱀의 전략: 질문과 일반화
뱀이 여자를 유혹하는 방식은 매우 은밀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나님은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되,
단 하나, 선악과만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뱀은 여기서 교묘하게 단어를 섞어 ‘선악과 금지’와 ‘모든 나무의 허용’을 편의상 동일 범주로 일반화해 버립니다.
이 전략은 오늘날 종교다원주의의 논리와 유사합니다.
“불교면 어떻고 기독교면 어떻고, 결국 진리는 하나인데?”
이렇게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방식이 바로 뱀의 첫 전략이었습니다.
4. 말씀을 과장하고 왜곡하는 하와
하와는 이미 이 질문에서 무너집니다.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죽을까 하노라.”
그러나 하나님은 ‘만지지 말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또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하셨지 ‘죽을까 하노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세 가지 왜곡이 발생합니다.
- 덧붙임
- 과장
- 왜곡
기독교 역사에서 부패가 시작된 지점도 동일했습니다.
말씀을 조금씩 덧붙이고, 인간 기준으로 재해석하면서 타락이 길을 열죠. 루터의 종교개혁은 결국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습니다.
5. 아담은 어디 있었는가?
많은 사람이 간과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본문의 뱀의 말은 모두 복수형(너희)로 되어 있습니다.
즉, 아담은 하와와 함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침묵했고, 아내를 지켜주지 않았습니다.
죄는 이렇게 함께 무너져 내립니다.
“함께 있었고, 함께 먹었다”는 본문은 아담의 책임이 결코 가벼울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6. 관점의 무너짐: 하말티아
뱀은 본격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하와의 관점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원어 하말티아(ἁμαρτία)는 “과녁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죠.
인간은 하나님이라는 과녁에서 시선을 돌리는 순간 자기 관점, 자기 규례를 만들기 시작하고, 그때부터 죄가 탄생합니다.
하와가 “그 나무를 본즉”이라고 한 순간, 이미 그 눈은 하나님의 관점이 아닌 사단의 관점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관점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7. 예수님은 어떻게 이 유혹을 이기셨는가
사탄도 예수님을 유혹할 때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말씀을 정확한 ‘오리지널 의도’로 되돌려 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예수님은 자신의 권능으로 유혹을 밀어내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정확하게 말씀으로, 그리고 순종으로 인간이 실패한 영역을 회복하셨습니다.
8. 광야의 불뱀과 놋뱀의 의미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자 불뱀들이 그들을 물었습니다.
백성이 회개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하지만 모세는 불뱀을 만들 수 없었기에 놋뱀을 만들어 달았습니다.
‘놋’은 성경에서 ‘심판’을 의미합니다.
나무 위에 달린 놋뱀은 신약에 오면 이렇게 연결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 3:14)
장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대신 지고 심판을 받으신 참된 놋뱀의 실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는 율법 때문에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못했지만, 바울은 다메섹에서 그 사실을 깨닫고 완전히 뒤집힙니다.
9. 우상화된 ‘느후스단’, 그리고 오늘날의 신앙
열왕기하 18장에 보면, 이스라엘은 시간이 지나 모세의 놋뱀을 우상화합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은 그것을 부수며 이렇게 부릅니다.
“느후스단(놋조각).”
놋뱀의 본래 의미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숭배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 예배를 ‘형식’만으로 드리는 경우
- 헌금이나 봉사로 삶의 순종을 대신하려는 태도
- 십자가를 ‘부적’처럼 사용하는 문화
십자가는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물건을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라, 말씀과 복음을 붙드는 생명의 신앙입니다.
10. 세 가지 유혹, 그리고 하나님의 뜻
요한일서 2장은 이렇게 결론을 내려줍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다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을 넘어뜨린 유혹 역시 동일한 구조였습니다.
오늘날도 이 유혹은 동일하게 작동합니다.
혼란한 시대일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서는 관점, 그리고 형식이 아닌 본질을 붙드는 신앙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