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06)-돕는 배필 (창세기 2:15~18)


창세기 강해(06)-돕는 배필 (창세기 2:15~18)

이 내용은 송태근목사님의 창세기 강해
 6번째
 
"돕는 배필"이란 주제로 전하실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1. ‘좋지 아니하니’의 오해와 히브리어적 뉘앙스

창세기 2장 18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이 표현을 단순히 ‘부정적 평가’로 이해하지만, 히브리어 원어를 살펴보면 훨씬 깊은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좋지 아니하다’는 말은 ‘로(Lo, 아니다)’ + ‘토브(Tov, 좋다·아름답다)’의 조합인데, 이때 ‘토브’는 단순한 감정적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완성된 계획, 균형 잡힌 아름다움, 하나님의 의도된 선한 목적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토브’는 하나님이 완성하실 궁극적인 아름다움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로 토브(좋지 않다)’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완성된 계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 즉 미완성이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궁극적 그림은 아름답고 선한 완성인데, 현재는 그 완성이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는 뜻이지요.

따라서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는 말은 “지금 이 상태는 하나님의 완성된 계획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완성 계획: 돕는 배필의 등장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성경은 곧바로 알려줍니다.
18절 후반부에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처음부터 의도하신 완성된 그림은 바로 돕는 배필의 창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단지 그 계획을 점진적으로, 교육적으로, 인격적으로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오해하듯 “아담 혼자 있는 것을 보시고 갑자기 계획을 바꾸어 여자를 만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며, 그분의 계획은 처음부터 완전했습니다.



3. 그런데 왜 먼저 동물들이 등장할까? (창 2:19)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돕는 배필을 만든다고 하셨으니 다음 구절에서 바로 여자가 등장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의외의 장면을 보여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 부르나 보시려고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이 문장은 돕는 배필의 창조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동물들을 아담 앞으로 데려와 이름을 짓게 하십니다. 히브리적 개념에서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 존재의 속성과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본다는 의미입니다.

아담은 동물들을 바라보며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첫째, 이 피조물들은 자기와 ‘격(階級)이 다르다’는 것

곰, 사자, 사슴… 이름은 달라도 모두 동물이며 인간과는 본질이 다릅니다.
아담은 그들을 ‘짝’으로 삼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게 됩니다.


둘째, 모든 동물에게는 짝이 있는데 ‘자신에게만 짝이 없다’는 것

아무리 작은 미물이라도 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자신에게는 그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경험하게 하신 자기 자각의 시작이었습니다.



4. 하나님은 왜 즉시 여자를 만들지 않으셨을까?

하나님은 아담을 인격적 존재로 대하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아무 설명 없이 여자를 “여기 있다, 네 짝이니 데려가라” 하고 주셨다면, 아담은 그 관계의 의미와 필요성을 깊이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압적으로 명령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깨닫도록 자연과 피조물이라는 시청각 자료를 통해 마음을 여는 방식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담은 다음과 같은 내적 자각에 이릅니다.

  • “나와 짝이 될 존재는 동물과는 격이 다르구나.”
  • “모든 피조물에게도 짝이 있는데, 나에게는 없다.”
  • “나는 혼자서는 완전하지 않구나. 나에게도 돕는 배필이 필요하구나.”

이 깨달음은 하나님이 강제로 주신 것이 아니라, 아담 스스로 발견하도록 유도하신 사랑의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시는 방식이 바로 이렇습니다.
강압하거나 조종하지 않으시고, 인격적이며 사랑의 관계 속에서 깨달음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5.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하나님의 작업

창세기 2장 21절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원문에서도 ‘깊은 잠’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며, 성경 전체에서 잠은 종종 죽음을 상징하는 언어로 쓰이곤 합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죽음을 ‘잠잔다’라고 표현하셨던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 표현은 단순한 수면이 아니라 아담의 상징적 죽음, 곧 새로운 생명을 위한 희생의 순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옆구리를 여시고 갈빗대를 취하십니다. 히브리적 이해에서 뼈는 피가 흐르는 자리, 곧 생명의 근원으로 여겨졌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아담의 생명을 취해 또 다른 생명, 곧 하와를 만드신 것입니다.



6. 갈빗대의 진정한 의미: 하등함이 아니라 ‘옆’과 ‘파트너’

오랫동안 여러 문화권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하등하거나 부속적 존재로 여겨지는 오해가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갈비’라는 말의 히브리어 본래 의미는 ‘사이드(side)’, 즉 ‘옆’·‘파트너’·‘동등함’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성경은 여성을 남성보다 아래나 위에 두지 않습니다. 창조의 본질부터 남녀는 동등한 가치와 지위를 가진 존재로 등장합니다.

여성을 가리키는 ‘돕는 배필’이라는 표현의 히브리어도 매우 중요합니다.

  • 돕다(에제르, ezer)
  • 이 단어는 성경 전체에서 거의 하나님께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2)에 등장하는 ‘도움’이 바로 이 에제르입니다.

즉, 여성을 향한 ‘돕는 자’라는 표현은 결코 낮은 위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처럼 귀하고 능동적인 역할을 의미합니다. 여자는 남자의 부족함을 채우는 존재가 아니라, 완성을 이루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7. 여자를 아담에게 이끌어오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십니다. 이는 이전에 동물들을 아담에게 데려와 이름을 짓게 하셨던 장면과 연결됩니다. 당시 아담은 동물들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1. 자신과 격이 같은 존재가 없다는 것
  2. 모든 생물에게는 짝이 있지만, 자신에게만 없다는 것

하나님은 이제 참된 배필, ‘또 다른 나’를 아담 앞에 데려오십니다. 그리고 아담은 인류 최초의 시라고 할 만한 감탄을 터뜨립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아담은 하와를 보며 단번에 깨달았습니다.
“아, 이 존재는 나와 같은 존재구나. 나를 이루는 또 하나의 나구나.”

그들은 서로를 온전히 알아보았고, 분열도 없었으며, 감춰야 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벌거벗었으나 수치가 없었다고 기록됩니다. 완전한 통합과 하나됨의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8. 남녀의 결합 속에 감추어진 더 큰 비밀: 그리스도와 교회

이 창조 이야기를 단순히 ‘가정 이야기’, ‘남녀의 사랑 이야기’ 정도로만 이해하면 성경의 깊이를 놓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 30~32절에서 창세기 2장 24절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함이라.”

바울이 보기에 아담과 하와의 결합은 단순한 결혼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미리 보여주는 표상이었습니다.

  • 아담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 하와는 그의 신부인 교회

따라서 창세기의 결혼 제도는 영원한 제도가 아니라 종말 이후에는 사라질 한시적 제도입니다. 예수님도 “부활 때에는 장가도 시집도 아니가고 천사들과 같으니라”(막 12:25)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결혼 제도는 영원한 목적을 위한 ‘그림자’, 즉 복음을 드러내기 위한 상징적 장치인 것입니다.



9. 가정이 소우주인 이유: 생육·번성·구원의 원리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타락이 찾아오면서 이 명령은 다른 차원의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 ‘번성’은 단순한 숫자 증가가 아니라, 영적 생명과 구원의 확장으로 이어져야 했습니다.

이 두 가지—생육과 구원—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공동체가 바로 가정입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스토리를 가장 압축적으로 담아낸 소우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기신 장면도 이를 보여줍니다. 육신의 형제에게 맡기지 않고 제자에게 맡긴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새로운 가족, 곧 교회 공동체의 출현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새로운 가족이며, 그 원형은 가정입니다.



10. 결혼의 본질: 사랑이 아니라 책임과 헌신

에베소서 5장은 부부 관계를 명확하게 정의합니다.

  • 아내는 남편을 존중하며
  • 남편은 아내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것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남편의 사랑이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자신을 재물처럼 내어놓는 책임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남자의 역할을 제사장적 역할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제사장은 자신의 유익이 아닌 타인을 위해 존재할 때 그 가치가 드러납니다.

가정이 무너지는 이유 중 많은 부분이 이 책임의 부재에서 비롯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남편은 가정의 영적 책임자, 그리고 헌신의 최종 자리에 선 사람입니다.



11. 성령 충만의 첫 번째 현장은 가정

에베소서 5장은 “술 취하지 말라…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명령 뒤에 곧바로 가정 공동체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어집니다.

왜일까요?

성령 충만은 먼저 가정에서 나타나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 사랑받는 아내
  • 존중받는 남편
  • 존경하는 자녀
  • 책임지는 부모

교회에서 아무리 봉사와 사역을 잘해도, 가정에서 사랑과 존중이 없다면 성경은 그것을 참된 충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가정은 신앙의 첫 번째 훈련장이며, 복음을 실천하는 가장 현실적이며 실제적인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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