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27)-롯의 아내의 실패(창세기 19:12-22)
이 글은 송태근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
27번째, 롯의 아내의 실패라는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왜 멸망했는가
오늘 창세기 19장은 워낙 잘 알려진 본문이라, 대부분의 이야기는 이미 머릿속에 떠오를 거예요. 그래서 이런 질문으로 시작해 보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왜 멸망했을까요?
흔히 떠올리는 대답은 이겁니다.
“죄악이 관영했기 때문이다. 특히 동성애 때문이다.”
물론 성경에는 소돔이 극도로 문란한 도시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동성애라는 단일한 죄목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보다 훨씬 깊은 원인을 지적합니다.
선지자 에스겔의 증언을 먼저 보겠습니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에스겔 16:49 상)
여기서 소돔의 죄악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교만함, 풍족함, 태평함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 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에스겔 16:49 하–50)
핵심은 이것입니다.
이웃을 외면한 풍요와 무감각입니다.
소돔의 멸망은 단지 성적 타락 때문이 아니라, 이웃 사랑이 완전히 붕괴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으로 말씀하신 이웃 사랑의 정반대 지점에 소돔이 서 있었던 것이죠.
소돔 성문에 앉아 있던 롯의 자리
아브라함을 떠났던 두 천사가 마침내 소돔에 도착합니다.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창세기 19:1)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었다”는 말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성문에 앉는다는 것은 아무나 가능한 자리가 아닙니다. 재판관이거나, 그 지역의 유력자, 유지에게만 허락된 자리입니다. 이 말은 곧, 외지인이었던 롯이 소돔에서 성공의 정점에 올랐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롯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 의로운 롯이 저 불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을 보고 들으므로 그 심령이 상하니라” (베드로후서 2:8)
겉으로는 성공했지만, 그의 영혼은 날마다 병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롯이 쫓았던 성공은 결국 모조품이었고 신기루였습니다.
나그네를 대하는 도시의 민낯
롯은 나그네로 온 천사들을 집으로 맞이합니다. 그러나 밤이 되자 도시 전체가 소란에 빠집니다.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창세기 19:5)
이 장면은 소돔의 죄악을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나그네를 보호하지 않고, 오히려 해하려는 공동체입니다.
롯은 이렇게 호소합니다.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창세기 19:7)
그리고 이어지는 8절의 말은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합니다.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창세기 19:8)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롯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아버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 제안이 아니라, 그 사회의 타락을 극단적으로 고발하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롯의 말은 “이 정도로 지금 이 도시는 미쳐 있다”는 고발에 가깝습니다.
눈먼 도시, 길을 잃은 공동체
결국 사람들은 롯을 밀치고 문을 부수려 합니다.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고” (창세기 19:10)
그리고 그 결과는 이렇습니다.
그 무리들은 눈이 멀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육체적 현상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상징입니다.
소돔은 눈먼 도시였습니다. 볼 것은 많았지만, 진짜 길은 보지 못하는 도시였습니다.
불러냄 받은 자, 교회의 원형
천사들은 롯에게 말합니다.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창세기 19:12)
이 장면은 신약적 관점에서 보면 교회의 원형입니다.
에클레시아, 곧 불러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멸망은 확정됩니다.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창세기 19:13)
그러나 롯의 사위들은 이 말을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창세기 19:14)
진리는 그들에게 먼지처럼 털어 버릴 이야기였습니다.
붙들어 끌어내시는 하나님
이제 가장 긴박한 순간이 옵니다.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창세기 19:15)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창세기 19:16)
롯은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창세기 19:16)
롯은 스스로 나온 것이 아니라, 붙잡혀 끌려 나옵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입니다.
돌아보지 말라, 시선을 옮기라
천사들은 명령합니다.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창세기 19:17)
‘돌아보지 말라’는 말은 단순한 몸의 동작이 아닙니다.
옛 삶에 시선을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롯은 다시 타협을 시도합니다.
“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창세기 19:20)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 요구마저 들어주십니다.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창세기 19:21)
하나님은 궁극적인 구원을 위해 우리의 미성숙한 타협까지 감내하십니다.
못 온 것이 아니라 안 온 사람
마침내 심판이 시작됩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창세기 19:26)
롯의 아내는 소알까지 올 시간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지 않았습니다.
뒤돌아본다는 것은 옛 삶의 가치를 다시 붙잡는 것입니다.
그녀는 길 중간에서 멈췄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선택의 신비
예수님은 이 사건을 하나님의 나라로 해석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7:21)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돌연히 임합니다.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누가복음 17:24)
그리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누가복음 17:32)
한 사람은 데려감을 얻고, 한 사람은 버려집니다.
롯은 왜 구원받았는가
마지막으로 성경은 롯의 구원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창세기 19:29)
이것은 아브라함 개인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곧 그리스도를 향한 언약 때문입니다.
롯은 결국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습니다.
사랑의 추적자 하나님
롯의 아내는 우리의 옛사람입니다.
롯은 지금 우리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지체하는 인생을 끝까지 붙드시는 사랑의 추적자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도시 역시 눈먼 도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붙들고 이끌어 내십니다.
그 은혜를 기억하며, 오늘 밤도 그분 앞에 마음을 쏟아놓는
구원의 자리에 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