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0)-가인의 표 (창세기 4:9-15)
강해말씀 중 "가인의 표"라는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정리한 것입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창세기 4장 9절에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묻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단순한 위치 확인이 아닙니다. 법정 용어로 말하자면 심문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을 던지신 이유는, 가인의 안에 숨겨진 악의 동기와 인간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가인의 입장을 떠올리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가인의 자리에 서 본 사람들입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우리는 가인의 문화에서 자유할 수 없습니다. 가인의 문화란 살해하고, 빼앗고, 밀어내는 문화입니다. 우리는 본래 사망의 자리에 있었고, 그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진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가인만을 향한 질문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향한 질문입니다.
가인의 첫 반응, 거짓말
하나님의 질문에 가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이것은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어둠의 권세 아래 있는 자들의 첫 번째 반응은 언제나 거짓입니다. 속에 진실이 없기에 꾸미고, 포장하고, 과장하며 자신을 지키려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위선이나 허세라고 부릅니다.
사탄의 속성 자체가 거짓이며, 인류를 무너뜨린 방식 그대로 인류를 계속 무너뜨립니다. 요한일서 3장 12절은 가인이 “악한 자에게 속하여” 아우를 죽였다고 증언합니다. 이 문제는 단순한 감정 문제가 아니라 소속의 문제, 곧 영적인 문제입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인의 두 번째 반응은 더 심각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 말은 단순한 변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정면 도전입니다.
“그건 내 역할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할 아닙니까?”
“왜 그 책임을 나에게 묻습니까?”
이것은 책임 전가입니다. 삶이 절박해질수록 인간은 쉽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건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 아닙니까?”
거짓, 도전, 책임 전가.
이 세 가지는 가인의 속성이며, 동시에 인류 안에 깊이 자리 잡은 경향입니다.
하나님이 심문 형식으로 질문하신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가인의 모습을 통해 인류의 본질을 고발하시기 위함입니다.
“네 이웃의 피를 흘려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레위기 19장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네 이웃의 피를 흘려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우리는 직접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손에 피만 묻히지 않았을 뿐, 다른 사람의 생존을 위협하는 구조에 무의식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경우는 너무나 많습니다.
부동산 투기는 남의 잠자리를 빼앗는 행위이며, 탐욕을 통해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옥시 사건처럼 이익을 우선한 선택은 실제로 생명을 위협했습니다. 이는 특정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인의 문화가 만들어낸 구조적 죄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4절은 말합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돌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하나님의 기쁨은 다른 사람을 돌보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길은 자기 이익을 지키는 길이며, 죄에 물든 인간에게 이 길은 너무나 합리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땅으로부터 저주받은 농사꾼
하나님은 판결을 내리십니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가인의 직업은 농사였습니다.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본업을 잃었다는 의미입니다. 소득도, 터전도, 정착도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는 유리하며 방황하는 자가 됩니다.
이 삶의 조건 속에서 가인은 어떤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남을 밀어내고, 빼앗고, 점령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입니다. 팍스 로마
역시 힘으로 유지된 거짓 평화였습니다. 그 한복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세상의 평화를 폭로하셨습니다.
성을 쌓는다는 것의 의미
가인은 결국 성을 쌓습니다. 에녹성입니다.
성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 운명은 내가 지킨다”는 선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로부터 완전히 떠났다는 증거입니다. 그 후손들은 무기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성을 지키기 위해 무기가 필요했고, 무기는 침탈과 약탈의 역사를 반복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문화입니다.
“내 죄벌이 너무 무겁습니다”
가인의 말은 회개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가 무겁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죄벌이 너무 무겁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판단에 대한 불복입니다.
“내가 한 일에 비해 벌이 과하지 않습니까?”
사실 공의로 본다면 가인은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형을 유보하셨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가인은 그 은혜 앞에서 반항합니다. 이것이 종교인의 모습입니다.
가인의 두려움과 피조세계의 반격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이 표현은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원문은 “나를 만나는 모든 것”에 가깝습니다. 죄로 비틀어진 질서가 부메랑이 되어 인간을 공격합니다. 자연, 경제, 사회 구조까지도 인간을 위협합니다. 이것이 가인의 두려움이었습니다.
가인의 표, 부끄러움과 보호의 이중성
하나님은 가인에게 표를 주십니다.
히브리어로 ‘오트’입니다.
이 표는 첫째, 부끄러움의 표였습니다.
살인자의 흔적이었고, 공개적인 고발이었습니다.
동시에 둘째, 보호의 표였습니다.
그를 죽이는 자에게 더 큰 벌을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이중성은 출애굽기 유월절의 피, 이사야의 임마누엘의 징조,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서 완성됩니다.
십자가, 가인의 표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는 부끄러움과 치욕의 자리였습니다.
예수님은 가인의 표처럼 그 부끄러움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우리가 예배 자리에 나오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존재였음을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변명과 언어가 멈춥니다.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오늘 이 가인의 표에 담긴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과 은혜가,
모든 성도들의 삶에 깊이 새겨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