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51) 정말 잊었을까? (창세기 40:16-41:9)

그를 잊었더라
지난주 우리는 창세기 40장 마지막 절을 보았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이 구절을 놓고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떻게 잊어?”
상식선에서 생각해 보면, 이건 단순한 건망증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잊은 걸까요? 아닙니다. 잊은 것이 아니라 기억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외면한 기억이었어요.
이 사실은 오늘 본문인 41장 9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죄”가 복수형이라는 점입니다. 여러 죄 가운데 하나를 떠올린다는 말이에요. 그렇다면 이 여러 죄 중 하나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요셉을 2년 동안 외면하고 잊은 척했던 죄입니다.
외면한 기억
감옥에 있을 때 상황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때 요셉은 사실상 ‘갑’이었습니다. 옥의 모든 일을 위임받아 죄수들을 섬겼고,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은 ‘을’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꿈 해석을 통해 분명한 채무 관계도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되면서 상황은 완전히 뒤집힙니다.
갑과 을이 바뀐 것입니다.
이제 그는 궁의 고위직 관원이 되었고, 요셉은 여전히 감옥에 남아 있습니다. 그 입장에서 과거를 돌아보고 싶겠습니까? 감옥에서의 억울함과 수치를 떠올리고, 보은을 생각하고 싶겠습니까?
상식적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대개 자신이 불편해지는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어 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이 의도가 더 분명해집니다.
“וְלֹֽא־זָכַ֧ר שַֽׂר־הַמַּשְׁקִ֛ים אֶת־יוֹסֵ֖ף וַיִּשְׁכָּחֵֽהוּ׃ פ”
“베로 자하르 사르 하마쉬킴 에트 요세프 바잇쉬카헤후”
마지막 단어 ‘바잇쉬카헤후’는 단순히 ‘잊었다’라기보다,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외면했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담고 있습니다.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그러나 상황이 바뀝니다. 애굽 전역에 바로의 꿈을 해석할 자가 아무도 없게 되었을 때, 술 맡은 관원장은 마침내 입을 엽니다.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이 고백은 회개의 언어라기보다, 궁지에 몰린 상황 속에서 튀어나온 기억의 토해냄에 가깝습니다. 바로의 꿈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운명이 걸린 문제일 수 있었습니다. 왕이 극심한 번민에 빠져 있었고, 그 곁에서 섬기던 술 맡은 관원장은 그 압박을 매일같이 견뎌야 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요셉이 떠오르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떠올랐을 겁니다. 다만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죠.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전환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지우려 한 기억을 다시 꺼내십니다.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보은의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상처를 덮고 싶고, 과거를 외면하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꿈이라는 장치를 통해, 술 맡은 관원장의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요셉을 다시 끌어올리십니다. 그 기억을 피할 수 없도록 만드십니다. 결국 그 입술을 통해 요셉의 이름이 다시 나오게 하십니다.
요셉 역시 이 과정에서 깊은 상처를 입었을 것입니다.
그는 사실상 세 번의 뼈아픈 배신을 경험합니다.
첫째는 형들의 배신,
둘째는 보디발 아내의 터무니없는 누명,
셋째는 술 맡은 관원장의 의도적인 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요셉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요셉의 놀라운 고백
마침내 요셉은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그 장면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 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이때 요셉의 대답은 놀랍습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아직 꿈의 내용도 듣지 않았습니다. 틀릴 수도 있습니다. 잘못 말하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자리입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편안함’은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편안한 대답의 진짜 의미
이 샬롬은 “잘 될 것입니다”라는 막연한 위로가 아닙니다.
요셉이 말한 편안한 대답은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나는 응답을 뜻합니다.
요셉은 오랜 감옥 생활과 반복되는 배신,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통해 한 가지를 몸으로 배웠습니다.
상황이 길이든 흉이든,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서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바로 앞에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이 아니라, 삶으로 체득된 신앙의 선언입니다.
우리가 요셉 이야기를 시작할 때 붙잡았던 단어가 무엇이었습니까?
형통이었습니다.
형통은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상태가 아닙니다.
형통이란, 하나님의 계획이 나를 통해 진행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선언하고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실 것입니다”
오늘 이 밤, 이 말씀은 바로 우리를 향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보다 앞서 그분의 계획 안에서 준비된 편안한 대답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람은 잊을 수 있어도,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간은 반드시, 정확하게 도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