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38)-라반의 복선(창세기 29:14-20)

물처럼 흐르는 하나님의 경영
창세기 29장의 전체 얼개는 분명합니다.
야곱은 드디어 먼 길 끝에 외삼촌 라반의 동네 근처에 도착하고, 우물가에 앉아 쉬고 있습니다. 바로 그때, 장차 그의 아내가 될 라반의 딸 라헬이 양 떼와 소 떼를 이끌고 물을 먹이러 우물가로 나옵니다.
이 장면을 보면 하나님의 시간표가 얼마나 정교하고 절묘한지 감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경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경영은 물과 같다”고 말하고 싶어요.
물의 성질은 이렇습니다.
막히면 돌아가고, 다시 막히면 스며들고, 넘치면 넘어갑니다. 그러나 멈추지 않습니다.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흐름 자체는 중단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불순종과 실패가 널려 있어도 하나님의 목적과 경영은 쉬지 않고 흐릅니다. 야곱은 자신의 연약함과 잘못으로 형과 아버지의 분노를 사서, 거의 도망치듯 집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 험한 도망의 끝에서, 장차 자기 인생을 뒤흔들 여인을 우물가에서 만나게 될 줄을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성공한 것 같든, 실패한 것 같든 하나님의 시간표는 여전히 “째깍, 째깍” 움직이고 있습니다.
과도해 보이는 환대 속 깔린 복선
“라반이 그의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며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말하매”
(창세기 29:13)
이 본문을 읽으면 라반의 행동이 매우 호의적으로 보입니다. 먼 길을 찾아온 조카를 안고 입맞추며 환대합니다. 그러나 이후의 이야기를 알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나요?
‘이거, 너무 과한 거 아니야?’
사실 이것은 야곱 인생에 드리워질 큰 덫의 복선입니다. 라반은 훗날 야곱을 가장 교묘하게 속이고, 착취하고, 이용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첫 장면에서는 굉장히 따뜻해 보입니다.
이 장면은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라반이 본 것
“그가 그의 누이의 코걸이와 그 손의 손목고리를 보고 … 그 사람에게로 나아감이라”
(창세기 24:30)
창세기 24장에서 라반은 처음 등장합니다. 그 장면에서 라반이 제일 먼저 본 것은 리브가가 착용한 금은 패물과 우물가에 서 있는 낙타들이었습니다.
낙타는 당시 엄청난 재산이었습니다. 라반은 사람보다 먼저 재물을 봤습니다. 그리고 그때도 흔쾌히 아브라함의 종을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29장에서 똑같은 장면이 반복됩니다. 이번에는 리브가의 아들, 야곱이 찾아옵니다. 라반의 과한 환대는 그의 성품이 아니라, 계산된 시작입니다.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창세기 29:14)
한 달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라반은 야곱에게 제안을 합니다.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창세기 29:15)
말투는 부드럽고 따뜻합니다. 아직 발톱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덫은 놓였습니다.
라헬을 향한 집요한 열망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창세기 29:16)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창세기 29:17)
‘레아는 시력이 약하다’는 표현은 번역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상 라헬과 대비되는 표현이며, 부족함을 의미하는 쪽이 자연스럽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창세기 29:18)
야곱은 분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원하는 것을 명확히 정하고, 기간까지 스스로 제시합니다.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창세기 29:18)
기다림보다는 쟁취, 맡김보다는 계산이 야곱의 생리입니다.
애매모호한 라반의 대답
“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창세기 29:19)
이 말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주겠다는 말도 아니고, 안 주겠다는 말도 아닙니다. 라반은 정확한 약속을 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의 속에는 다른 계산이 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창세기 29:20)
이 구절은 낭만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야곱의 집요한 욕망과 성격을 보여주는 문학적 묘사입니다. 그는 원하는 것을 위해 시간도 감정도 모두 쏟아붓는 사람입니다.
속인 자가 속임을 당하다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창세기 29:21)
“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창세기 29:23)
어둠 속에서 야곱은 속습니다. 과거 아버지를 속였던 그가, 이제 동일한 방식으로 속임을 당합니다.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창세기 29:25)
여기서 ‘속이다’라는 단어는 이삭이 야곱에게 속았을 때 사용된 동일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를 시적으로, 정의롭게 풀어가십니다.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창세기 29:26)
야곱은 장자의 순서를 바꿨고, 이제 그 순서의 법칙 앞에서 자신이 걸려 넘어집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인생을 하나씩 빚어가십니다.
사랑받지 못한 여인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창세기 29:31)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레아를 하나님은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태를 여셨습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레아의 아들들의 이름은 모두 그녀의 상처와 기도가 담긴 고백입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
(창세기 29:32)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다”
(창세기 29:33)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창세기 29:34)
그리고 마침내,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창세기 29:35)
유다는 사랑받지 못한 여인의 태에서 태어났고, 그 지파에서 메시아가 오셨습니다.
인간의 욕망과 계산이 뒤엉킨 밤 속에서도 하나님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이루십니다.
하루의 실패로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넘어져도 하나님의 자비 앞에 넘어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최고의 전략은 하나님의 자비에 인생을 거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