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09)-아벨의 제사 (창세기 4:1-8)
“야다”에서 시작되는 인간의 역사
창세기 4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히브리어로는 “야다(알다)”라는 표현이 쓰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우리말 번역은 그 의미를 훨씬 실제적으로 풀어내며, 관계의 실질성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잘 번역된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인류의 원역사가 한 가정의 출생 이야기로 이어지지요.
여기서 중요한 관점이 하나 있어요. 성경의 인물 소개는 역사 순서의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구속사를 설명하기 위해 선택하신 인물들이 등장하는 방식이라는 점이에요. 그래서 가인이 훗날 “누가 나를 죽이려 하면 어쩌겠습니까?”라고 말하는 대목을 보면, 그 사이에 생략된 시간이 많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성경은 연대기적 기록이라기보다, 하나님이 드러내고자 하시는 구속사의 맥을 따라 인물을 선택해 보여주시는 기록이라는 것이지요.
하와의 “착각”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기대
하와는 첫 아들을 낳고 이렇게 말해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여기서 “득남”에 해당하는 단어가 “카나”라고 설명합니다. 이 단어가 특별히 창조와 관련된 영역에서 쓰이는 독특한 단어라는 점을 강조하지요. 그러면 하와가 단순히 “아들을 얻었다” 정도를 말하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 어떤 큰 기대와 해석을 품고 있었다는 암시가 됩니다.
설교는 여기서 하와의 내면을 이렇게 읽어 줍니다.
하와는
창세기 3장에서 약속된 ‘여자의 후손’을 떠올리며, 가인이 그 약속의 성취라고 오해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호와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을 붙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지요.
아벨 “허무”라는 고백
이어 둘째가 태어납니다. “아벨”이지요. 설교는 아벨의 이름이 가진 의미를 아주
인상 깊게 짚습니다.
아벨은 “티끌, 먼지”, 더 집약하면 “공허, 허무”에 가까운 뜻이라는 거예요.
부모가 둘째를 낳고 “허무하다”는 이름을 붙인다면, 그건 그냥 우연이 아니라 그 집안에 이미 어떤 곡절이 있었다는 이야기로 읽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 곡절은 자연스럽게 누구와 연결됩니까? 바로 가인이지요.
시간이 흐르면서 부모는 가인에게서 깊은 절망을 보게 되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좌절을 경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에게 “인생은 티끌 같고, 허무하다”는 고백이 섞인 이름을 붙였다는 해석이 설교 흐름 속에서 제시됩니다.
두 사람의 직업은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이제 두 사람은 각자 삶의 길을 갖게 됩니다.
- 아벨: 양 치는 자
- 가인: 농사하는 자
여기서 흔히 나오는 단순한 설명이 하나 있어요.
“아벨은 피 있는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피 없는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이
거절하셨다.”
하지만 설교는 이 해석이 핵심을 비껴간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모세 율법의 제사에도 곡물만 드리는 제사(소제)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곡물을 드렸기 때문에 거절”이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지지요. 또한 하나님이 직업을 차별하시거나 “농사꾼이라서” 거절하실 분도 아니시고요.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문제는 제물의 종류가 아니라, 그 예배의 본질이라는 쪽으로 시선을 옮겨야 합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심판의 그림자
설교가 특별히 강조하는 구절이 바로 이것이에요.
“세월이 지난 후에…”
겉으로는 그냥 “시간이 좀 흘러서”처럼 읽히지만, 이 표현이 본문의 의미를 여는 열쇠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설교는 이 표현을 세 조각으로 풀어줍니다.
- “세월(날)”이라는 표현
- “지난(케에츠)”이라는 단어가 끝, 종말, 심판과 연결될 때 쓰인다는 점
- 그리고 “후에”가 열매, 결과가 나온다는 의미로 읽힌다는 점
그래서 결론은 이것입니다.
이 제사는 단순한 예배 사건이 아니라,
한 절기가 지나 ‘결과’가 드러나는 시점, 즉 예배자의 삶이 결국
하나님 앞에서 평가되는 때를 암시한다는 거예요.
여기서 설교는 우리의 정체성을 강하게 붙듭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예배자입니다.
신자, 성도라는 말보다 더 본질적으로 우리는
예배자로 창조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의 삶은 길고 멀고
험한 예배자의 길이고, 언젠가 반드시 “추수할 때”가 옵니다. 개인적 종말도,
역사적 종말도 다가오고,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의 베마 앞에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지요.
아벨은 “첫 새끼와 기름진 것”을 드렸다
이제 본문은 아주 미세한 차이를 보여 줍니다.
- 가인: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드림
- 아벨: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가장 좋은 부분)으로 드림
이 차이를 보고 “예배는 정성을 더 많이 들여야 하나님이 받으신다”라고 단순 결론을 내릴 수 있어요. 하지만 설교는 그 결론에 “그 정도로 끝나면 오히려 위험해진다”고 말합니다. 예배가 치성 싸움이 되고, 정성 싸움이 되면, 마치 정성으로 구원을 얻는 것 같은 방향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이 차이는 뭘 말하는 걸까요?
“믿음으로” 드린 제사
설교는 해답을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 찾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핵심은 “더 좋은 재료”가 아니라, 믿음으로 드렸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설교는 여기서 “믿음”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의지의 결심’ 정도로 축소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을 연결하며 이렇게 설명하지요.
- 믿음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
-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
-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자랑하지 못하게 하심
즉, 아벨의 제사가 받아들여진 이유는 “아벨이 더 성실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은혜, 그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제물은 그 믿음의 증거물일 뿐이에요.
하나님은 “제물”보다 먼저 “사람”
이 대목이 설교 전체에서 아주 강력한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지요.
-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으나”
-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시니라”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먼저 받으신 것이 아니라,
아벨을 먼저 받으셨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만 거절하신 게 아니라,
가인 자신을 거절하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문제는 제사의 형식이 아니라, 예배자의 존재—그 내면의 소속과 상태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하였다”
설교는 더 직설적인 구절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요한1서 3:12)
여기서 핵심은 이것이에요.
가인은 “살인해서 악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악한 자에게 속해 있었기 때문에 그 열매가 살인으로 터져 나온 겁니다. 즉, 죄는 행동 이전에 소속의 문제를 드러낸다는 거예요.
그래서 설교는 신앙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신앙은 결국 “정성의 싸움”이 아니라,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의 싸움이라는 겁니다.
문 앞에 엎드린 죄
가인이 거절당하자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 “가인이 몹시 분하여”
- “안색이 변하니”
설교는 이것을 “얼굴이 떨어졌다”는 의미로 풀어줍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얼굴을 떨어뜨리고, 하나님의 얼굴(낯)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죄인의 특징이라는 거예요. 아담이 범죄 후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숨은 것”과 같은 흐름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은 가인에게 경고하십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설교는 여기서 죄의 모습을 아주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죄는 문 앞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존재처럼 웅크리고 있고, 삼킬 자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우는 사자”의 이미지와 연결되는 장면이에요. 죄는 우리를 “원한다(욕망한다)”고 표현되지요.
하지만 결정적인 현실이 있습니다.
인류는 죄를 다스릴 능력이 없었고, 결국 죄는 확대되며 노아 홍수 때까지 인류를
폐역으로 끌고 갑니다.
설교는 죄의 속성을 두 가지로 정리합니다.
- 죄는 영향력이 있다 (한 개인을 넘어 공동체와 역사로 번짐)
- 죄는 확대된다 (점점 더 큰 파괴로 확장됨)
그 출발점이 바로 이 본문에서 드러난다는 겁니다.
고의성이 드러나는 살인
8절은 섬뜩하게 이어집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설교는 주석과 고대 역본(사마리아역, 70인역)의 전승을 언급하면서, 어떤 자료에는 “우리가 들로 나가자”는 유인 문구가 포함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매튜 헨리의 분석을 빌려, 가인이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가 죽였다는 쪽으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가인의 살인은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 고의이며, 더 무서운 것은 “쳐죽이니라”라는 표현이 주는 잔인함입니다.
사망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설교는 마지막에 문법적 포인트까지 건드립니다.
“쳐죽이니라”가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어 현재성을 내포한다고
설명하며, 이것은 살인이 단지 한 번의 과거 사건이 아니라,
사망의 냄새를 풍기며 지금도 진행되는 현실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즉, 가인의 이야기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죄의 본성과 그 열매가 지금도 인간 역사 속에서 반복된다는 경고로 읽어야 한다는 거예요.
13) 참된 예배는 “치성”아닌 “십자가 앞에서의 들통”
설교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원래 가인의 자리에 있었던 존재입니다.
그런데 아벨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모형이고, 결국
그리스도의 중보적 죽음을 통해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거예요. “소속”이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예배의 본질은 이것입니다.
예배는 단지 정성을 더하는 자리가 아니라,
매번 십자가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 들통나는 자리입니다.
“나는 주님과 함께 못 박혀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이 다시 드러나고, 그럼에도
나를 생명으로 옮기신 은혜 앞에 엎드리는 자리가 예배라는 것이지요.
설교는 실제 사례를 통해 이것을 더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했다고 말하는 어르신이 “분위기가 좋고 밥이 맛있다”는 이유로 이단성 논란 교회를 만족스럽게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한 번도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존재가 가인으로 들통난 적이 없었던 신앙을 경고합니다.
기독교는 장식품이 아니고 교양 과목이 아니라,
“영원히 죽느냐, 영원히 사느냐”의 문제이며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느냐”의 문제라는 겁니다.
가인의 길에서 아벨의 길로 일어서는 예배자
결국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제사의 형식”을 가르는 본문이 아니라, 소속과 생명을 가르는 본문이에요. 우리는 예배자이고, 세월이 지난 후에—열매와 결과가 드러나는 때에—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러니 참된 예배는 매번 주님 앞에서 다시 한번,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할 존재였음을 고백하고,
그럼에도 나를 은혜로 옮기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사랑을 붙드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가인의 길로 들어갔다가,
아벨의 길로 다시 일어서는 복된 예배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