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40)-아롱사태 (창세기 30:25-43)

창세기강해(40)-아롱사태 (창세기 30:25-43)

이 내용은 송태근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 
40번째, 아롱사태라는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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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가게 하소서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창세기 30장 25절)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 머문 세월은 어느덧 20년에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야곱이 라반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 하나를 던지게 됩니다.
이 요청은 탈출일까요, 귀향일까요?

겉으로 보면 지긋지긋한 머슴살이, 시집살이 같은 세월을 벗어나고 싶은 탈출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귀향의 본능입니다. 다만 그 귀향이 촉발된 이유가 문제입니다. 사람은 현재의 삶이 고달플 때 비로소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다면, 굳이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날 이유가 없지요.

야곱의 삶은 분명 고달팠습니다. 그 고달픔이 그로 하여금 “이제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을 품게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땅의 삶을 나그네의 삶으로 묘사합니다. 나그네의 삶은 본질적으로 임시적이며, 고달픔이 정상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너무 좋다고 느끼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습니다.

야곱이 훗날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험악한 세월”이었다고 고백한 것도 이 시기를 염두에 둔 말일 것입니다. 이 땅의 삶은 나그네의 삶이고, 나그네의 삶은 고달픔을 품고 있습니다. 그 고달픔이 우리를 고향으로 향하게 합니다.



돌아가야할 위치, 고향

히브리어에서 ‘고향’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출신지가 아닙니다.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 내가 마땅히 돌아가야 할 위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는 사람들일까요? 고향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우리는 이중적인 나그네입니다. 육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우리는 임시 거주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의식은 늘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 시선을 두고 있는가?



야곱의 위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시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에게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창세기 30장 26절)

이 구절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가 드러납니다. 야곱은 이미 아내도 있고 자식도 있지만, 여전히 독립된 가장이 아닙니다.
“일하고 얻은 처자”라는 표현 속에는 이 가정의 주도권이 여전히 라반에게 있다는 현실이 담겨 있습니다.

야곱의 처지는 사실상 종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았지만, 경제권과 질서의 중심에는 언제나 라반이 있었습니다. 한 신학자는 이 관계를 애굽의 바로와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에 비유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죽도록 일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의 순간, 하나님은 그들이 받지 못했던 임금을 정확히 계산해 주셨습니다. 이 비유는 오늘 우리에게도 큰 위로를 줍니다. 억울한 수고, 계산되지 않은 헌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놓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정확하게 세고 계십니다.



라반의 속내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
(창세기 30장 27절)

새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주님께서 자네를 보시고 나에게 복을 주신 것을, 내가 점을 쳐 보고서 알았네.”

라반은 하나님이 야곱을 통해 복을 주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인식의 방식이 문제입니다. 점을 쳐서 알았다고 말합니다. 이 집안의 기초는 여전히 우상과 미신입니다.

훗날 라헬이 야반도주할 때 훔쳐 나오는 드라빔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드라빔은 가정의 수호신이자 점치는 도구였습니다. 이 사실은 라반뿐 아니라 야곱의 가정에도 아직 우상이 깊이 남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이런 가정을 단번에 부수지 않으십니다. 강압적으로 끌어내지 않으십니다. 기다리시고, 관망하시고, 때로는 발목을 붙드셔서 불 속에서 건져 올리십니다. 하나님은 질긴 사랑의 추적자가 되어 한 인생을 끝까지 놓지 않으십니다.



황당한 게임의 시작

“또 이르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창세기 30장 28절)

라반은 이제야 품삯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러나 이미 늦었습니다. 야곱은 그동안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정산의 시간이 온 것입니다.

야곱은 매우 창의적인 제안을 합니다.

“외삼촌께서 내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아도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 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창세기 30장 31절)

야곱은 일종의 게임을 제안합니다. 그 규칙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이 내 품삯이 되리이다”
(창세기 30장 32절)

라반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얼룩진 것들을 모두 떼어내어 사흘 길 떨어진 곳으로 옮깁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야곱이 이길 수 없는 구조입니다.



인간의 방법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가져다가…”
(창세기 30장 37절)

신풍나무는 오늘날 플라타너스로 알려진 나무입니다. 껍질이 벗겨지면 얼룩무늬가 드러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야곱은 이 가지를 물 먹는 곳에 세웁니다.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창세기 30장 39절)

이 장면은 유전학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이는 고대 근동의 전형적인 미신적 방법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이 방법 자체에는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벧엘의 하나님이라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창세기 31장 3절)

야곱의 귀향 본능은 하나님이 심으신 것입니다.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창세기 31장 13절)

하나님은 창세기 28장에서 하신 약속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성실하신 분입니다.

마침내 야곱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창세기 31장 42절)

모든 계산, 모든 보상은 하나님의 손에 있었습니다. 신풍나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셨습니다. 야곱과 라반 모두 온전한 신앙인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주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질긴 사랑의 추적자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늘 하나님이 계십니다. 각본을 쓰시고, 연출하시고, 이야기를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고난의 풀무에서 꺼내어 정당한 몫을 돌려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시간, 억울한 수고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이 질긴 사랑 앞에 우리의 고백이 다시 무릎 꿇는 은혜의 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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