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23)-하나님의 설득 (창세기 15:1-7)

광야의 아침, 하늘을 바라보는 믿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침에 눈을 뜨면 무엇을 보아야 했을까요?
땅이 아니라, 오직 하늘이었어요.
“오늘도 만나가 내릴까?”라는 질문을 안고, 그들은 매일같이 하늘을 올려다봐야 했습니다.
이 시간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어요. 무려 40년이었지요.
그리고 하나님은 그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예외 없이, 하루 분량의 만나만 허락하셨어요.
수백만 명이 동시에 매일 아침, 어제의 경험을 근거로 오늘을 보장받지 못한 채 하늘을 바라보는 삶.
그 자체가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설계된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한 가지를 분명히 배웠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한 번도 그들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눈물 속에서도,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신음 속에서도
하나님은 늘 보호하시고 공급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이 일 후에” 시작된 하나님의 말씀
창세기 15장을 보면,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창세기 15장 1절)
개역개정 이전 성경에는 이 표현이 더 분명했어요.
“이 일 후에”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지금부터 등장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인 사건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창세기 14장의 전쟁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은 318명의 사람을 데리고 전쟁에 나가,
여러 족속과 왕들 사이에서 벌어진 자원 전쟁을 치르고 돌아옵니다.
이 전쟁은 단순한 이념 싸움이 아니었어요.
오늘날의 중동 전쟁이 그렇듯, 본질은 자원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회복하여 승리자로 돌아왔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의 이유
그런데 이상합니다.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세기 15장 1절)
아무 일도 없는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속내를 정확히 아셨다는 증거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하나 등장합니다. 바로 “방패”입니다.
방패는 농기구가 아닙니다. 놀이 도구도 아닙니다.
전쟁에서 사용하는 방어용 무기입니다.
이 말은 곧, 아브라함의 두려움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왔다면,
패배한 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지요.
법도, 제도도, 보호 장치도 없는 시대에
아브라함은 언제든 다시 공격당할 수 있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자손이 없는 사람의 가장 깊은 두려움
이 시대에 부의 상징은 두 가지였습니다. 땅과 자손.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치명적인 결핍이 하나 있었어요.
바로 자식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두려움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종족 보존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였고, 미래가 완전히 막힌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냅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창세기 15장 2절)
아브라함은 더 이상 감추지 않습니다.
“나는 자식이 없습니다.”
이것이 그의 두려움의 실체였습니다.
하늘의 별과 단수로 주어진 약속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밖으로 이끄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세기 15장 5절)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 원문에서 ‘자손’이라는 단어는 단수로 사용됩니다.
문법적으로는 복수가 맞지만,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단수를 사용하셨습니다.
이 의미를 신약은 분명하게 해석해 줍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라디아서 3장 16절)
하늘의 별처럼 많을 자손의 약속은
결국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약속이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그리고 마침내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결정적인 표현이 나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세기 15장 6절)
이 믿음은 아브라함이 스스로 만들어낸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끊임없이 아브라함을 설득하시고, 인도하시고, 붙드셨습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이 심어주신 은혜의 결과입니다.
로마서는 이 사실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로마서 4장 3절)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로마서 4장 5절)
쪼개진 제물 사이를 지나간 횃불
아브라함은 땅의 약속 앞에서 다시 묻습니다.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창세기 15장 8절)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 질문을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언약의 형식으로 응답하십니다.
짐승들이 쪼개지고, 그 사이로 타는 횃불이 지나갑니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창세기 15장 17절)
이 장면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이 언약을 깨는 자는 죽음으로 책임을 지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 언약을 깨는 쪽은 인간이었습니다.
그 죽음의 자리를 대신 담당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
출애굽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구원하신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의 고통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출애굽기 2장 24–25절)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역사는 그 성실하심 위에서 움직입니다.
기억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는 오늘
창세기 15장은 그래서 매우 중요한 장입니다.
자손과 땅,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그 나라를 위해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를 걸고 약속하신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언약을, 약속을, 그리고
눈물로 드린 기도를 기억하십니다.
이 밤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기억하시는 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