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17)-노아와 세 아들 (창세기 9:20-29)


창세기강해(17)-노아와 세 아들 (창세기 9:20-29)

17번째 노아와 세아들이란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 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노아의 술 취함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성경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대목입니다. 아버지의 하체가 언급되고, 노골적인 표현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표면만 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노아가 술에 취해 하체를 드러낸 채 누워 있었고, 둘째 아들 함이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밖으로 나가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그 결과 함은 저주의 아이콘처럼 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객관적으로 보면 선뜻 이해되지 않는 질문이 생깁니다. 실수는 누가 더 큰 것처럼 보입니까? 많은 사람의 상식으로 보면 노아의 책임이 더 커 보입니다. 반면 함은 단지 본 것을 말했을 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노아의 행동에 대해서는 아무 평가도 남기지 않고, 오히려 함의 행동에 대해서는 저주 선언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 본문에 단순한 도덕 이야기 이상의 숨겨진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게 됩니다.



새 창조의 문맥에서 본 노아 사건

먼저 본문의 큰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창세기 9장 18절)

홍수 심판 이후, 온 땅의 생명은 모두 쓸려 내려갔고, 노아와 그의 가족만이 남았습니다. 물이 겨우 빠진 이 시점에서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창세기 1장의 명령을 갱신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단순한 인구 증가의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이 땅에 보존하고 퍼뜨리기 위한 생명 축복의 명령이며, 오늘날 우리의 언어로 말하면 선교적 사명과도 깊이 연결된 명령입니다.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창세기 9장 19절)

이 선언 이후에 노아의 사건이 등장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은 인류의 완전히 새로운 시작점입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벌어진 사건이기 때문에, 성경은 이를 매우 신중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의 행동은 무엇이 문제였는가

노아는 포도 농사를 시작했고, 포도주를 만들어 마시다 술에 취해 벌거벗은 채 잠들었습니다. 그때 함이 지나가다 그 장면을 보게 됩니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창세기 9장 22절)

이 장면만 보면 함에게 내려진 저주는 지나치게 가혹해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 기자는 이 사건을 해석할 실마리를 다른 두 형제의 행동 속에 숨겨 놓습니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창세기 9장 23절)

여기서 반복되는 강조점은 분명합니다. “보지 아니하였더라” 입니다. 두 형제는 얼마나 보지 않으려 애썼는가 하면, 얼굴을 돌리고 뒷걸음질로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습니다.

함은 “보았고”, 셈과 야벳은 “보지 않았습니다”. 이 차이가 본문의 핵심입니다.



죄의 시작은 ‘봄’에서 시작되었다

성경 전체에서 죄의 시작은 언제나 ‘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세기 3장 6절)

하와는 경계선을 넘기 전에 먼저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봄이 욕망을 낳고, 욕망이 죄를 낳았습니다. 에덴의 상실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홍수 이후, 인류의 새로운 출발점에서 함은 다시 한 번 이 동일한 패턴을 반복합니다. 하나님이 설정하신 질서를 보는 것으로 넘어선 것입니다.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다’는 표현의 의미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하나 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벌거벗음”과 “하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히브리 사상에서 벌거벗음은 단순한 노출이 아니라 부부 관계의 영역과 연결됩니다. 이를 가장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본문이 레위기입니다.

“각 사람은 자기의 살붙이를 가까이 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18장 6절)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은 더 분명합니다.

네 어머니의 하체는 곧 네 아버지의 하체이니 너는 범하지 말라 그는 네 어머니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
(레위기 18장 7절)

“너는 네 아버지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아버지의 하체니라”
(레위기 18장 8절)

이 말씀에 따르면 “아버지의 하체”는 곧 어머니의 하체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함이 보았다는 것은 단순한 사고 장면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부부 관계의 경계를 침범하는 의식적이고 의도된 시선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하나님은 행동만이 아니라 마음의 동기와 의식을 함께 보십니다. 함은 이미 하나님의 경계선을 넘은 상태였습니다.



왜 가나안이 저주를 받는가

다음으로 더 어려운 질문이 남습니다.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창세기 9장 24–25절)

죄를 지은 것은 함인데, 왜 그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을까요? 죄가 유전되는 것일까요?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 본문은 모세오경의 기록 목적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의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한 경고입니다. 가나안 땅은 비어 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오랜 세월 축적된 우상숭배와 성적 타락, 특히 근친상간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경계하신 것은 유전이 아니라 가치관의 답습이었습니다. 함의 인식 세계가 가나안 문화로 이어질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노아의 선언은 단순한 감정적 저주가 아니라, 히브리 전통에서 말하는 족장 선언, 즉 한 인생의 궤적을 꿰뚫어 본 예언적 선언입니다.



셈의 장막과 종말의 방향

마지막으로 노아는 셈과 야벳에 대해 선언합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창세기 9장 26–27절)

야벳은 자신의 장막이 아니라 셈의 장막에 거하게 됩니다. 이는 혈통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셈의 족보를 따라가면 결국 아브라함이 나오고, 이삭이 나오며, 그리스도께로 이어집니다.

셈의 장막은 곧 그리스도의 우산입니다. 인류의 안전과 구원은 결국 이 장막 아래에서 완성됩니다.

가나안이 정복당하는 것은 단순한 패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회복의 방식입니다. 우리 역시 함처럼 가나안적 가치관 속에서 살던 존재들이지만, 여인의 후손이신 그리스도께 정복당함으로써 구원을 얻었습니다.



함은 누구이며, 우리는 누구인가

함은 단순히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이 새롭게 시작하시는 창조 질서에 정면으로 대항한 불신앙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그 함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인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수를 밟아 승리하심으로, 야벳처럼 셈의 장막 아래 거하는 은총을 입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짧은 노아의 이야기 속에 하나님은 이미 역사의 종말과 구원의 완성을 미리 담아 두셨습니다. 종말은 끝이 아니라, 완성입니다. 그리고 그 완성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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