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20)-아브라함의 인생과 믿음의 관계 (창세기 12:1-4)

인간의 꿈을 내려놓게 하실 때
12장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익숙한 본문이지만, 동시에 이 본문만큼 오해를 많이 받는 장도 드뭅니다. 많은 경우 이 장은 ‘믿음의 결단’이나 ‘순종의 모델’로 단순화되지만, 본문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역사는 훨씬 더 깊고 복합적입니다.
이 장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이 인간의 꿈을 어떻게 내려놓게 하시고, 때로는 부수어 가시며,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인간의 삶 속에 실현되어 가는가를 보여 주는 본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도들이 평생 동안 걸어가야 할 고단한 여정, 곧 나그네의 길입니다.
아브라함의 첫 부르심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의 출발은 결코 신앙적으로 준비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실은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통해 분명히 드러납니다.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 7:1–2)
스데반의 증언에 따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란에 머물기 이전, 곧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이미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의 등장이 하란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신약과 함께 읽어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훨씬 앞선 시점에서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다
창세기 기록은 또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창세기 11:31)
이 본문에서는 이주의 주도권이 아브라함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데라에게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7장 1절에서는 분명히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이 차이는 모순이 아니라, 당시 사회 구조를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족장 시대에서 아버지는 가문의 왕이자 제사장이었고, 모든 결정의 최종 책임자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영적인 사건은 너무도 분명했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구조는 아버지 데라의 권위 아래 있었습니다. 결국 데라는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아들에게 일어난 일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감지하고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
아브라함의 가정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섬기던 가문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는 이 사실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 24:2)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은 하나님을 알던 사람들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설명 없이, 설득 없이 영광 가운데 아브라함의 인생에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소명입니다. 소명은 인간의 준비나 열심에서 시작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에서 시작됩니다.
‘지연시키는 자’ 데라
그들은 결국 하란에서 멈춥니다. 강을 건너기 직전의 지점에서 주저앉습니다. 고대인들에게 강을 건너는 것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기에, 하란은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마지막 경계선’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데라’라는 이름의 뜻입니다. 데라는 ‘지체하는 자’, ‘지연시키는 자’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성경의 흐름을 보면,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데라의 생애는 하란에서 끝을 맺습니다. 데라가 죽은 이후에야 아브라함은 다시 길을 떠납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읽어야 할 장면입니다.
두 번째로 찾아오신 하나님
구약의 기록상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본격적인 교제는 12장에서 시작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세기 12:1)
이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첫 만남이 아니라, 두 번째 방문입니다. 이미 갈대아 우르에서 한 차례 찾아오셨던 하나님은, 이제 아브라함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두 가지 약속을 주십니다. 자손과 땅, 곧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입니다.
‘떠나라’는 명령에 담긴 하나님의 방식
본문에 등장하는 ‘고향’이라는 말은 단순한 출신지를 뜻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에레츠’는 삶의 기반이 되는 땅 전체, 익숙함과 안정, 과거의 모든 매커니즘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익숙한 둥지를 흔드십니다. 편안함은 하나님의 꿈을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나그네라고 부르고, 광야는 머무는 곳이 아니라 하늘만 바라보도록 훈련받는 장소로 등장합니다.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가라’는 단순한 이동 명령이 아닙니다. ‘걸어가라’, ‘말씀에 이끌려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아직 보이지 않지만, 말씀을 듣고 신뢰하며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10:17)
믿음은 확신이 아니라 설득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 노출되는 삶 속에서 자라납니다.
“내가 하겠다”라는 하나님의 자기 선언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세기 12:2)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주어는 ‘너’가 아니라 ‘내가’입니다. 신앙은 인간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실패와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아브라함을 끝까지 붙드십니다.
약속의 땅에서 맞이한 기근
아이러니하게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자마자 기근이 찾아옵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창세기 12:10)
‘내려갔다’는 표현은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신앙의 하강을 암시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아닌 바로를 치십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영적 수준에 맞춘 하나님의 교육 방식이었습니다.
말씀에 ‘이끌려 간’ 아브라함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창세기 12:4)
이 ‘따라갔다’는 말은 순종의 결단이라기보다, 말씀의 능력에 의해 이끌려 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라함의 인생을 주도하기 시작한 순간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이름의 진짜 의미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살았다고 평가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 11장)
그러나 그 믿음은 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마지막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 4:10)
결국 모든 영광은 결국 모든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위대한 신앙인의 전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설득과 인내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아브라함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붙드시고, 시간을 통해, 삶을 통해,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 한 해도 그렇게, 하나님께 이끌려 걸어온 길이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