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54) 그럴 줄 알았나? (창세기 43:1-14)

창세기 강해(54) 그럴 줄 알았나? (창세기 43:1-14)

이 글은 송태근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
54번째, 그럴 줄 알았나?라는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 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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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근이 심하고

창세기 43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이 짧은 문장은 앞선 이야기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만, 사실은 아주 중요한 변곡점을 담고 있어요.
이 ‘기근’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반드시 창세기 41장과 비교해서 읽어야 합니다.

먼저 창세기 41장 56절을 보겠습니다.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

그리고 5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이 두 절을 포함해 보면, ‘기근’이라는 말이 세 차례 반복됩니다. 반복은 강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같은 기근이지만 히브리어 단어가 다르다는 점이에요.



하자크와 카베드

창세기 41장에서 사용된 기근이라는 단어는 ‘하자크(חָזָק)입니다.

이 단어는 ‘강하다’, ‘맹렬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굉장히 심각하지만, 아직은 대응이 가능한 상태를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인 창세기 43장 1절에서 사용된 기근은 다른 단어입니다.
바로 ‘카바드(כָּבַד)라는 단어예요.

카바드(כָּבַד) ‘무겁다’, ‘압도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힘들다는 정도가 아니에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상태를 말합니다.

가난에도 단계가 있듯이, 기근에도 단계가 있어요.
생활이 불편한 가난이 있고, 생계가 어려운 가난이 있고, 그리고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가난이 있습니다.
카바드는 바로 그 마지막 단계입니다.

히브리어는 이런 미세한 차이를 아주 정확하게 단어로 구분합니다.



주어를 강조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 43장 1절의 문장은 히브리어 문법상 주어와 동사의 순서가 뒤집혀 있습니다.

히브리어 문장은 보통 동사가 먼저 나오고 주어가 뒤따릅니다.
하지만 주어를 특별히 강조하고 싶을 때, 이 순서를 의도적으로 바꿉니다.

43장은 바로 그 방식이에요.
문법을 깨면서까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기근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상태다.”
그 절박함을 문장 구조 자체로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다시 가서 양식을 조금 사오라

이렇게 막다른 골목에 이른 상황 속에서 야곱의 말이 등장합니다.

“그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

이 말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들리나요?

야곱도 알고 있어요.
애굽으로 다시 내려보내는 것이 아비로서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그곳에는 이미 시므온이 볼모로 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두려움의 땅이에요.

그런데도 “다시 가라”고 말합니다.
저는 여기서 야곱에게 인간적인 동정심이 들지 않을 수 없어요.

지금까지 야곱은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인물로 많이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는, 삶에 몰려 더 이상 선택지가 없는 한 아버지의 모습이 보입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의 모습이에요.



유다가 나서다

이때 유다가 나섭니다.

“유다가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에게 엄히 경고하여 이르되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이미 상황은 분명합니다.
시므온은 볼모로 잡혀 있고, 베냐민 없이는 다시 애굽에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기근은 점점 더 깊어져, 이제 야곱이 붙들고 있던 마지막 생명줄, 베냐민까지 요구하는 자리로 몰아갑니다.

이건 우연이 아닙니다.
이건 하나님의 손길로 볼 수밖에 없어요.



야곱의 톨레돗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한 문장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는 창세기 37장에서 시작된 ‘야곱의 톨레돗’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이야기는 요셉 개인의 성공담이 아니에요.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성도의 그림자입니다.
요셉은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하나님은 이 구조를 통해,
성도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베냐민

“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이 말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베냐민을 놓지 않으면 요셉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거예요.

요셉의 얼굴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붙잡고 있던 마지막을 내려놓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는 메시지입니다.



쓸데없는 일은 없다

야곱은 탄식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

이 말, 너무 이해가 됩니다.
“왜 쓸데없는 말을 해서…”라는 마음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인생에 쓸데없는 일은 없습니다.
사소해 보이는 일들 속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빚는 장치를 심어 두셨습니다.

이걸 보는 눈이 바로 영적인 시각입니다.



잘 달린다고 1등은 아니다

인생은 달리기에 비유되곤 합니다.
하지만 잘 달린다고 꼭 1등 합니까?

우사인 볼트조차도 스타트 파울로 결승선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탈락한 적이 있습니다.
가장 빠른 사람이었지만, 규칙 앞에서는 예외가 없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나간다고 복이고, 넘어졌다고 실패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하나입니다.
택한 백성을 깎고, 빚고, 다듬는 것.



잘못된 희망

절망은 무섭습니다.
하지만 절망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잘못된 희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개입하셔서
늘 우리의 시각을 바꾸고, 고치시는 데 모든 것을 거십니다.

야곱은 지금 하나님의 트레이닝 스케줄 위에 올라가 있는 상태입니다.



담보

그리고 마침내 이 장면에 도달합니다.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유다는 스스로 담보가 되겠다고 말합니다.
이 ‘담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아라브(עֲרָב)입니다.

이 단어에는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보증하다, 교제하다, 참여하다.

놀랍게도 이 모든 의미는 훗날 십자가에서 완성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담보가 되셨고,
죽음에 참여하셨으며,
그 결과 우리는 생명을 얻고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유다 지파에서 오셨습니다.



내려놓음

마침내 야곱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옵니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이 말이 나오기까지,
야곱은 얼마나 많은 밤을 울며 보냈을까요.

이건 변덕이 아닙니다.
이건 야곱의 톨레돗입니다.

야곱은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음으로써
집안을 살리고,
그리고 마침내 요셉의 얼굴,
곧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자리까지 밀어내십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우리가 십자가 앞에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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