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43)-엘 엘로헬 이스라엘 (창세기 33:1-10)

사백 명의 군대
창세기 33장 1절부터 20절까지를 보면, 야곱의 인생 속에 담긴 중요한 메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현재 장면은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편에서 형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야곱을 향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당시의 규모 감각으로 볼 때, 사백 명의 군대는 결코 환영이나 화해를 위해 움직이는 숫자가 아닙니다. 이것은 분명 전쟁을 연상시키는 장면입니다.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완전히 다르게 전개됩니다. 에서는 야곱을 보자마자 달려와 끌어안고 울며 화해합니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이 장면에서 화해는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말이 길 필요도 없었고, 조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화해에 이르기까지는 무려 20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이 화해의 진짜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개입
이 화해는 야곱이 준비한 선물 때문도 아니었고, 야곱이 멀리서 형을 보고 회개의 말을 외쳤기 때문도 아닙니다. 야곱은 그러한 고백을 하기 전에 이미 에서가 먼저 달려왔습니다. 이는 에서의 마음 안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야곱은 형을 맞이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가족과 재산을 나누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했습니다. 그러나 에서의 마음이 바뀐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의 계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31장과 32장을 통해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귀향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명령 뒤에는 반드시 도우심과 대안이 따릅니다. 에서가 어떤 모습으로 오든,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돌리시면 모든 문제는 끝이 됩니다.
먼저 달려나온 에서
야곱은 에서를 만나기 전날 밤, 얍복강에서 어떤 사람과 씨름을 했고 그 결과 환도가 어긋나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20년 만에 에서의 눈에 들어온 동생은 승리한 개선장군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남의 집살이를 오래 한 초라한 행색에, 한쪽 다리를 절뚝이며 다가오는 모습이었습니다.
만약 야곱이 당당하고 강인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에서가 본 것은 상처 입고 낮아진 동생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만져 두셨습니다. 그 결과, 에서의 마음속에 쌓여 있던 감정들이 한순간에 터져 나오며 먼저 달려가 동생을 끌어안고 울게 된 것입니다.
여전히 계산하는 야곱
그러나 야곱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변하지 않은 모습들이 드러납니다.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야곱은 여전히 위험을 분산시키는 계산을 하고 있습니다. 여종과 그 자식들을 맨 앞에 두고, 사랑하지 않았던 레아와 그의 자식들을 그 다음에 두며, 가장 사랑하는 라헬과 요셉은 맨 뒤에 둡니다. 이름은 이스라엘로 바뀌었지만, 인간적인 수단을 포기하지 못하는 야곱스러움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변화가 보입니다.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얍복강을 건널 때 야곱은 맨 뒤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 줄로 나뉜 행렬의 맨 앞에 서 있습니다. 사람이 한 번에 완전히 바뀌지는 않지만, 야곱에게는 분명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형 앞에서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힙니다.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이는 고대 근동, 특히 가나안 지역에서 강한 주종 관계를 고백할 때 취하던 공식적인 자세입니다. 다시 말해, 야곱은 형에게 종으로 살겠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해를 위한 진심 어린 태도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화해
에서의 반응은 완전한 화해였습니다.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그러나 야곱은 여기서도 인간적인 안전장치를 하나 더 둡니다.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야곱은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면서도, 하나님만 의지하기에는 여전히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도 은혜를 입으려 합니다. 에서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이 풀어 놓으셨지만, 야곱은 끝까지 예물을 강권합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이는 전날 밤 브니엘 사건을 자기 중심적으로 적용한 표현입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에서의 얼굴을 보며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야곱의 신앙 세계 중심에는 여전히 자기 자신이 놓여 있습니다.
또 속이는 야곱
에서가 동행을 제안하자, 야곱은 정중히 거절합니다.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그러나 야곱은 세일로 가지 않고 세겜으로 향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곳은 벧엘이었지만, 야곱은 벧엘 근처에서 머물기를 선택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따르기보다 비슷한 곳에서 타협하려는 인간의 속성을 보여줍니다.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숙곳의 뜻은 ‘우리간’입니다. 야곱은 먼저 자기를 위한 집을 짓고, 그 다음 가축을 위한 우리를 지었습니다. 이후 세겜에서는 밭을 삽니다.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이는 그곳에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평안히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지만, 야곱은 두려움 속에서 혼자 계산하고, 혼자 방향을 조정합니다. 하나님의 큰 뜻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평안의 약속과 인간의 불안
하나님이 원래 계획하신 길은 분명했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에 이르러”
그러나 그 평안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었지, 야곱의 계산 속에 있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지키려 애썼고, 그 과정에서 벧엘을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이 장면은 야곱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끝까지 내려놓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 그것이 바로 창세기 33장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메시지입니다.
세겜에 머물기로 하다
창세기 33장 18절과 19절은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줍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여기서 핵심은 ‘밭을 샀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잠시 머물렀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곳에 살겠다는 의지, 다시 말해 정착하겠다는 선언입니다.
문제는 이곳이 벧엘이 아니라 세겜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부르신 방향은 벧엘이었지만, 야곱은 그 길을 완전히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 선택 이후, 야곱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피눈물 나는 사건을 겪게 됩니다. 다음 장에서 등장하는 비극의 현장이 바로 이 세겜입니다.
엘 엘로헤 이스라엘
‘세겜’이라는 지명은 그 어원 자체가 의미심장합니다. 세겜은 본래 ‘짐을 지고 떠날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머물 곳이 아니라, 지나쳐야 할 곳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곳에 장막을 치고, 살 목적으로 밭을 삽니다. 머물러서는 안 될 곳에 머물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 선택은 단순한 지리적 판단이 아니라, 신앙의 방향이 어긋난 선택이었습니다.
야곱은 그 자리에서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붙입니다.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이 장면을 겉으로만 보면, 야곱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신앙적으로 회복된 것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종교적 언어에 쉽게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야곱과 비슷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은 사실 가나안 사람들이 종교 행사를 시작할 때 사용하던 전형적인 종교적 서두입니다.
‘엘’은 신을 뜻하는 말이고, ‘엘로헤’는 신들에 대한 복수 개념입니다. 당시 가나안 사람들 역시 그들의 신을 ‘엘’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스라엘’은 국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야곱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나를 도와주는 신, 내가 필요할 때 응답하는 신”이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여전히 야곱스러움
야곱은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지만, 그의 신앙의 중심에는 여전히 자기 자신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 제단이 참된 신앙 고백이었다면, 반드시 두 가지가 나타나야 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입니다.
둘째는 거룩에 대한 전제입니다.
그러나 이 제단을 쌓는 장면 어디에도 야곱이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고백했다는 표현은 나오지 않습니다. 거룩해졌다는 언급도 없습니다. 벧엘 사건 이후의 제단 행위 속에서, 야곱은 여전히 자기 중심적인 신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안에 여전히 야곱스러움이 깊이 녹아 있는 상태입니다.
신앙의 실체
이것이 참된 신앙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은 바로 다음 장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딸 디나가 세겜에서 참혹한 일을 겪고, 그로 인해 야곱의 아들들이 복수극을 벌인 뒤 야곱이 내뱉는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이 말씀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는 ‘나’, ‘내게’, ‘나를’, ‘내 집’입니다. 무려 일곱 번이나 등장합니다.
지금 몹쓸 일을 당한 사람은 딸 디나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관심은 끝까지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엘엘로헤이스라엘’의 실체입니다.
돌이켜보면 에서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그는 야곱을 고치기 위해 잠시 등장한 시청각 자료에 불과했습니다. 큰 체구의 형이 잠깐 나타나 야곱의 민낯을 드러내게 하고, 그 역할을 마친 뒤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그 이후로 에서는 다시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에 등장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 불편한 사람들, 감당하기 힘든 문제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빚으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재료들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
어떤 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일이든, 아픈 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안심할 수 있습니다.
결국 답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문제로 남지 않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 인생 주변에 긴장과 두려움을 허락하셔서, 다른 것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십니다.
오늘 기도할 때 떠오르는 불편한 사람들, 가족의 문제, 관계의 문제들조차도 하나님께서 나를 빚어 가시는 과정 속에 놓으신 재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처음과 나중, 우리의 운명이 모두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기억하며, 우리 안에 깊이 남아 있는 지독한 야곱스러움이 조금씩 뽑혀 나가는 정결한 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