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45) 왜 벧엘로 가야 하는가?(창세기 35:1-8)

창세기 강해(45)-왜 벧엘로 가야 하는가?(창세기 35:1-8)

이 내용은 송태근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
45번째 왜 벧엘로 가야 하는가란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 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죄보다 무서운 것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 무감각이 잘못된 신앙과 결합될 때입니다. 이 둘이 만나면 신앙이라는 이름을 쓴 괴물이 만들어집니다.

요즘 한국 교회 안에, 그리고 우리 사회 곳곳에 이런 유형의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괴물로 인식하지 못한 채, 오히려 신앙의 열심이나 정의감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걸까요?

오늘은 이 질문을 품고 야곱의 이야기, 그중에서도 창세기 35장 1절부터 8절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이 말씀은 앞장인 창세기 34장의 마지막 절과 연결해 보면 매우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34장은 디나 사건이라는 참혹한 비극으로 끝납니다. 아들들의 분노와 항의가 폭발하지만, 정작 아버지 야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딸의 고통 앞에서도 여전히 자기중심성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갑작스럽게, 거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벧엘로 올라가라.”

마치 말귀를 못 알아듣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귀에 대고 크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우리 누이

야곱의 아들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여기에는 “당신의 딸”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이 표현 하나에, 아버지 야곱에게서 느꼈던 자녀들의 깊은 상처와 거리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디나는 야곱이 사랑하지 않았던 레아에게서 태어난 딸이었고, 항의하고 있는 이 아들들은 바로 디나의 친오라비들입니다. 가정 안에서 반복되어 왔던 야곱의 편애와 왜곡된 사랑이, 결국 이런 비극과 분노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여전히 멈춰 서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십니다.



왜 하필 ‘벧엘’이었을까

벧엘은 야곱에게 결코 낯선 장소가 아닙니다.
창세기 28장에서, 형 에서를 피해 도망치다 지쳐 쓰러졌던 바로 그 장소입니다.

그곳은 단순히 “노숙을 했던 곳”이 아닙니다.
아무도 맞아주지 않는, 철저히 혼자였던 자리였습니다. 고대 사회에는 나그네를 환대해야 하는 관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집도 야곱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 장소의 원래 이름은 루스였습니다.
이 이름은 고대 언어의 뿌리를 따라가 보면 황폐, 절망, 혼돈(카오스)를 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혼돈의 장소에서 야곱을 만나시고, 그 이름을 벧엘, 곧 “하나님의 집”으로 바꾸십니다.



엘벧엘

창세기 35장에서는 이 벧엘이 다시 한 번 이름을 얻습니다.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엘벧엘은 “벧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벧엘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께 완전히 돌아온 상태,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는 삶의 자리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벧엘은 지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인생을 내어 맡기는 자리, 그분의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올라가라, 거주하라, 제단을 쌓으라

하나님은 야곱에게 세 가지를 명령하십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 제단을 쌓으라”

이 표현들은 놀랍게도 군사적 언어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야곱의 인생에 본격적으로 전쟁을 선포하신 장면입니다.

그 전쟁은 외부의 적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포하신 전쟁의 대상은 바로 야곱 자신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의 대적에게만 전쟁을 선포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옛 사람, 자아, 우상에게 전쟁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상들을 묻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야곱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였지만, 그의 집안에는 여전히 우상들이 가득했습니다.
이 모습은 오늘 우리의 모습과도 너무 닮아 있습니다.

우상은 반드시 돌이나 나무일 필요가 없습니다.
나 자신일 수도 있고, 욕망, 인정, 관계, 쾌락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시지만, 그 이후에는 진멸의 싸움을 시작하십니다. 이것이 출애굽 이후 처음 만났던 아말렉 전쟁이 가진 영적 의미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시작되는, 내 안의 옛 사람과의 싸움입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요즘 교회 안에서 무너지는 문제들은 대부분 여기서 시작됩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술, 이성 문제, 성적 타협, 가치관의 혼합.
하나님은 이 정도의 헌신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신앙은 전부 아니면 전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쟁 같은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과의 사연 하나가 새겨진 자리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이 장면은 야곱의 벧엘 이야기를 조용히 마무리합니다.
눈에 띄지 않는 인물의 죽음이지만, 그만큼 이 장소에 쌓인 시간이 느껴집니다.

엘벧엘은 야곱에게 하나님과의 사연 하나가 새겨진 자리였습니다.
오랜 신앙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 이야기가 없다면, 우리는 그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홀로 시작하시고 이루시는 승리

벧엘로 올라가는 길에서 야곱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보복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변 모든 고을에 두려움을 주셔서, 아무도 그들을 추격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 모든 과정은 한 가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결단이나 의지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회개조차도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붙드셔야 우리는 회개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벧엘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이 홀로 이루시는 승리에 참여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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