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36)-전쟁 같은 사랑(창세기 27:1-10)


창세기강해(36)-전쟁 같은 사랑(창세기 27:1-10)

이 내용은 송태근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
36번째 전쟁 같은 사랑이란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 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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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흐려짐의 의미

성경에는 종종 “눈이 흐려졌다”, “눈이 어두워졌다”는 표현이 등장해요.
이 표현은 단순히 나이가 들어 시력이 약해졌다는 생물학적 설명을 넘어, 깊은 영적인 의미를 함께 담고 있어요.

대표적인 예가 모세입니다. 신명기는 모세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도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신명기 34:7)

모세는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눈이 흐리지 않았다”고 기록돼요.
이 말은 자연사적 의미라기보다, 하나님께 붙들려 사명을 온전히 마쳤다는 뜻이에요.
바울이 말한 표현으로 하면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고백과 같은 맥락입니다.

반대로 이삭은 말년에 눈이 흐려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시력만 약해진 것이 아니에요.
미각이 무너지고, 촉감이 흐려지고, 듣는 감각까지 흐트러지면서 분별력이 무너져 가는 모습이 27장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보되 보지 못하는 시대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이사야 6:8–10)

이 말씀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어요.
볼 것만 보고, 들을 것만 들으면서도 하나님을 향해 깨닫지 못하는 상태.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대는 웃시야 왕이 52년간 통치하며 국가가 절정의 번영을 누리던 때였습니다.
경제, 농업, 국방 모두 최전성기였고, 백성들의 가치관은 철저히 세속적 성공에 매몰되어 있었어요.

이것은 눈에 보이는 위기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가치의 위기였습니다.



부강함 속에서 무너진 눈

중세 교회의 타락도 같은 구조였습니다.
종교개혁은 단지 사건이 아니라, 눈이 어두워진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어요.

교황 이노센트 3세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했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의 시대는 지났소.
동시에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시대도 지났소.”

교회 앞에는 은과 금을 실은 수레들이 줄지어 들어오고 있었어요.
교회는 부유해졌지만, 능력은 사라졌습니다.

한국 교회도 비슷한 길을 걸어왔어요.
사람은 많아지고 재정은 풍부해졌지만, 어느새 믿음보다 규모가, 깊이보다 성과가 기준이 되어버렸어요.

이삭의 눈이 어두워졌다는 것은 바로 이런 상태를 상징합니다.
겉으로는 여전히 족장이지만, 영적으로는 분별력이 무너진 상태였던 거예요.



조건부 축복과 무너진 감각들

이삭은 에서를 편애합니다.
그리고 별미를 조건으로 축복을 약속해요. 이 지점부터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섭니다.

그 이야기를 리브가가 듣고, 야곱에게 전달하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갑니다.
이 이야기에는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에서, 야곱 모두가 실수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인간은 실수하는데 하나님은 섭리를 멈추지 않으신다는 사실이에요.



전쟁 같은 사랑의 개입

하나님은 야곱의 인생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십니다.
그 방식은 부드러운 설득이 아니라, 전쟁 같은 사랑이에요.

야곱은 욕망과 의혹 속에서 축복권을 빼앗습니다.
장자권도, 축복도 자기 힘으로 쟁취합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남은 고백은 단 한 문장입니다.

“내 나그네 길의 햇수는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창세기 47:9)

이게 복입니까?
성경은 그렇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평생에 걸쳐 자기 자신이 주인이었던 삶의 뿌리를 뽑는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전부가 되기까지, 그는 끝없이 깎이고 무너져야 했습니다.



축복은 취소되지 않는다

야곱이 속임으로 축복을 받은 뒤, 이삭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이르되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
(창세기 27:33)

속였기 때문에 무효가 될 수 있지 않느냐고 묻고 싶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된 축복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 9장에서 기브온 족속과의 화친이 취소되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실수로 파기되지 않습니다.



야곱이 정의한 ‘진짜 복’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은 요셉을 축복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창세기 49:22)

그러나 그 무성함은 고난 없는 번영이 아니었습니다.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창세기 49:23)

그리고 핵심은 여기 있습니다.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창세기 49:24)

야곱이 말하는 복의 정체는 하나님의 손길이에요.
세상의 보장, 물질의 풍요가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려 살아온 경험 자체가 복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거예요.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창세기 49:26)

아브라함과 이삭의 복보다 자신의 복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왕 앞에서 안수하는 노년의 야곱

마침내 야곱은 애굽으로 내려가 바로 앞에 섭니다.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노인이었지만,
왕의 이마에 손을 얹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 순간 야곱은 압니다.
먹고 사는 것이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실이 되어 살아온 인생이 복이라는 것을요.



다시 회복되어야 할 고백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 고백이 다시 살아나는 삶,
다시 회복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눈은 밝아 보여도 영적으로 흐려질 수 있고,
눈은 흐려져도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끝까지 살아 있습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하나님의 손길을 복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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