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55) 두개의 관점 (창세기 44:1-14)

창세기 강해(55) 두개의 관점 (창세기 44:1-14)

이 내용은 송태근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
55번째 두개의 관점이란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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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가지 시선

말씀을 보기 전에 먼저 한 장의 그림을 떠올려 봅니다.

탁자 위에는 과일들이 놓여 있고, 뒤편에는 과일 바구니가 보이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세잔느의 정물화입니다.

이 그림을 조금만 유심히 보면 누구나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앞에 놓인 과일은 위에서 내려다본 시선으로 그려졌고, 뒤의 바구니는 정면에서 본 시선으로 그려졌습니다. 하나의 그림 안에 두 개의 시선이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매우 혁명적인 시도였습니다. 사진기가 등장하기 전까지 미술은 ‘사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잔느는 하나의 화폭 안에 여러 시선을 담아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성경 본문도 그렇습니다. 하나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여러 시선이 겹쳐 있습니다. 요셉의 시선, 형들의 시선, 아버지 야곱의 시선,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시선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이 여러 시선을 놓치지 않고 읽는 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서로 다른 마음으로

요셉은 아직 형들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잔치 자리에서 막내 베냐민과 형제들은 어리둥절한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호의, 설명되지 않는 친절 속에서 마음은 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잔치는 끝났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요셉이 그의 집 청지기에게 명하여 이르되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청년의 자루 아귀에 넣고 그 양식 값 돈도 함께 넣으라 하매 그가 요셉의 명령대로 하고”

여기서 ‘그 청년’은 베냐민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친혈육인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도록 명령합니다. 이 은잔은 단순한 계략이 아니라, 형제들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도구입니다.

“아침이 밝을 때에 사람들과 그들의 나귀들을 보내니라”

이 아침을 형제들은 어떤 마음으로 맞이했을까요?
양식을 얻었고, 베냐민도 무사히 지켰습니다. 이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 아버지 야곱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기대에 가득 찬 아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아침은 달랐습니다. 요셉은 이미 돌아가는 길에서 벌어질 모든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곧 다가올 진실의 순간을 바라보며, 복잡한 심정으로 이 아침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광야의 아침

한 선교사 부부가 17년 동안 캄보디아에서 사역하며 맞이한 매일의 아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맞이하던 아침 같았습니다.”

광야의 아침은 희망찬 아침이 아닙니다.
어제 내린 만나가 오늘도 내릴지 알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아침입니다.

형제들이 맞이한 이 아침도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곧 닥칠 일을 알지 못한 채 맞이한 아침이었습니다.



은잔의 추적

요셉은 청지기를 보내 형제들을 추격하게 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냐”

형제들은 강하게 항변합니다.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

이 말은 단순한 항변이 아닙니다. 신의 이름을 걸고 한 맹세입니다.
형제들은 실제로 결백했기 때문에 이렇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팩트만 놓고 보면 그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나이 많은 자부터

조사는 흥미로운 순서로 진행됩니다.

“그가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나이 적은 자에게까지 조사하매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지라”

왜 연장자부터 시작했을까요?
성경에서 나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책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더 큰 책임을 진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향해 돌을 들었던 사람들도 이렇게 반응합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공동체의 책임은 어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찢겨진 옷

은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자 형제들은 옷을 찢습니다.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 가니라”

이 장면은 과거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그리고 아버지 야곱도 옷을 찢습니다.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찢김은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의 인생에 남은 상처입니다.
요셉의 찢김은 야곱의 찢김이었고, 형제들의 찢김은 뒤늦은 회개의 몸짓이었습니다.



되돌아온 길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니… 그의 앞에서 땅에 엎드리니”

희망으로 출발했던 길은 절망의 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이 되돌아온 길이 바로 인생의 막이 열리는 길이라는 사실을.

유다의 고백은 결정적입니다.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형제들은 억울한 상황 속에서도 시선을 하나님께 둡니다.
은잔 사건은 과거의 죄를 떠올리게 했고, 20년 동안 숨겨왔던 가족의 상처를 다시 꺼내 놓았습니다.



유다의 담보

유다는 베냐민 대신 자신이 남겠다고 말합니다.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이미 이전에 유다는 아버지 앞에서 담보를 섰습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유다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리고 이 유다 지파를 통해 장차 그리스도가 오게 됩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담

형들의 고백과 유다의 행동을 보며 요셉은 깨닫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형들도 상처 입은 사람들이었고, 사랑에서 배제된 채 살아온 존재들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무너지는 모든 경계

오늘 본문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십자가 앞에 제대로 서 본 사람만이 피해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억울함과 분노는 십자가에서 내 죄를 만날 때 녹아내립니다.
복음의 능력은 사람을 바꾸고, 관계를 회복시키며, 역사를 새롭게 엮어 가십니다.

이 말씀이 오늘 삶의 억울함과 상처 속에서 신음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는 은혜의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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