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60) 축복인가? 저주인가? (창세기 49:1-7)

창세기 강해(60) 축복인가? 저주인가? (창세기 49:1-7)

이 내용은 송태근 목사님의 창세기강해
60번째 축복인가 저주인가의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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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인가 저주인가

창세기 49장은 야곱의 유언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아들들을 모두 불러 모읍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얼핏 보기에 전혀 축복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주처럼 들립니다.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창세기 49:1)

여기서 사용된 표현은 ‘당할 일’입니다.
이 말에는 분명 부정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습니다. 좋은 일을 두고 “당한다”고 표현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 마지막에 가면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정리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창세기 49:28)

분명히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왜 이 저주처럼 보이는 말씀이 축복일까?



당할 일

본문에서 말하는 ‘당할 일’은
그 아들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한 일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시간표와 계획 속에서 진행될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인간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비틀어지지 않습니다.

야곱의 축복은 감정적인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선언하는 예언적 축복입니다.



르우벤

야곱은 먼저 장자 르우벤을 부릅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창세기 49:3)

겉으로 보면 최고의 찬사입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이 말은 뒤집힙니다.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창세기 49:4)

‘물의 끓음 같다’는 표현은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파도처럼 일정하지 않고, 방향 없이 들끓는 상태입니다.

이 말의 실제 사건은 창세기 3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창세기 35:22)

이것은 단순한 성적 범죄가 아닙니다.
고대 사회에서 아버지의 첩을 범하는 행위는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공개적인 반역
이었습니다.

다윗 시대에 압살롬이 했던 행동과 같은 맥락입니다.
결국 르우벤은 장자였지만
자기 욕망을 통제하지 못함으로
장자의 권위를 잃어버립니다.



시므온과 레위

야곱은 이어서 시므온과 레위를 함께 묶어 말합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창세기 49:5)

여기서 ‘형제’라는 표현은
혈연을 강조하는 말이 아닙니다.
같은 목적, 같은 행동으로 연합한 공범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디나 사건을 가리킵니다.
여동생 디나가 세겜에게 능욕당하자
이 두 형제는 성읍 사람들을 몰살시킵니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창세기 49:6)

여기서 ‘소의 발목 힘줄’은 시적 표현입니다.
당시 세겜 사람들의 별명이 당나귀 또는 소로 불리웠습니다.
세겜 사람들을 짐승 취급하며 무참히 살육했다는 뜻입니다.

의분은 있었지만,
그 수단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목적이 옳아도 수단이 악하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저주에서 제사장으로

놀라운 것은 이후의 역사입니다.
신명기에서는 레위를 이렇게 부릅니다.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으니”
(신명기 33:8)

둠밈과 우림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도구입니다.
레위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지파로 바뀐 것입니다.

“그는 그의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의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며
그의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으로 말미암음이로다”
(신명기 33:9)

이는 혈연을 부정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관계보다
말씀의 순종이 우선이 되었다
는 뜻입니다.

그래서 레위는 땅의 분깃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는 제사장 지파가 됩니다.



유다

마지막으로 유다에 대한 축복이 이어집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창세기 49:8–10)

‘실로’는 메시야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야곱은 여기서 분명히 말합니다.

르우벤처럼, 시므온처럼, 레위처럼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들이
오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을 것이다.



모두 영적인 레위 지파

르우벤, 시므온, 레위의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주로 끝나야 할 그들의 역사를
구속의 도구로 바꾸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본질적으로는
르우벤이고, 시므온이며, 레위입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피로
우리를 다시 부르셔서
이 시대의 영적인 레위 지파,
세상을 향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이 소명과 사명이
우리 삶 가운데 실제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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