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9)-바벨탑의 의미 (창세기 11:1-9)


창세기 강해(19)-바벨탑의 의미 (창세기 11:1-9)

이 내용은 송태근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
19번째, 바벨탑의 의미라는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 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바벨탑 이야기의 시작

창세기 11장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벨탑 이야기입니다.
바벨탑이라고 하면 흔히 ‘언어의 혼잡’을 떠올리게 되지요.
하지만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벨탑 사건의 핵심은 단순히 언어가 갈라졌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지 않아요.
그 언어의 혼잡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 언어가 성경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살펴볼 때, 비로소 본문의 의도가 드러납니다.

성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창세기 11:1)

여기서 눈여겨볼 부분은 ‘언어’와 ‘말’이 따로 언급된다는 점이에요.
겉으로 보면 같은 말을 반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원문에서는 분명히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능과 결과의 차이

히브리어 원문에서 ‘언어’는 싸파(שָׂפָה)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언어의 기능적 측면을 가리켜요.
말이 입술을 통해 발화되는 행위, 다시 말해 소통의 도구로서의 언어를 의미합니다.

반면 ‘말’은 다바르(דָּבָר) 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 다바르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행위를 일으키고 결과를 만들어내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말씀도 같은 단어, 다바르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어떻게 되지요?
그 말씀은 반드시 사건을 낳고 현실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은 언제나 힘을 가지고 있어요.

즉, 인류는 단지 같은 언어 체계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같은 목적과 같은 방향성을 가진 ‘말’, 곧 같은 의도를 품은 공동체였다는 뜻입니다.



방황하는 인류의 모습

성경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였더라.”
(창세기 11:2)

여기서 ‘옮기다’라는 표현은 단순한 이동을 의미하지 않아요.
이 단어의 어원적 의미는 ‘말뚝을 뽑다’입니다.

고대의 주거 형태는 대부분 텐트 구조였기 때문에,
거처를 옮기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말뚝을 뽑아야 했어요.
즉 이 말은, 인류가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상태를 보여줍니다.

“여기가 안전할까? 저기가 안전할까?”
“여기가 참된 곳일까? 저쪽이 더 나을까?”

그런 방황 끝에 인류는 시날 평지에 이르러 드디어 정착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문제가 시작돼요.



벽돌과 역청의 의미

정착한 인류는 곧바로 행동에 나섭니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진흙을 대신하고”
(창세기 11:3)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어요.
첫째, 벽돌을 굽는 기술입니다. 이는 문명이 상당히 발전했음을 보여줍니다.
둘째, 역청을 사용했다는 점이에요.

이 역청은 어디서 처음 등장했을까요?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사용한 재료입니다.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고…”
(창세기 6:14)

역청은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의 보호와 구원을 위해 허락하신 수단이었어요.
하지만 인간은 문명이 발전할수록, 하나님이 주신 도구를
점점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다이나마이트가 광산 개발용으로 시작되었지만,
결국 전쟁과 살상을 위해 사용된 것처럼 말이에요.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

성경은 인류의 의도를 이렇게 밝힙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창세기 11:4)

여기서 ‘이름을 낸다’는 표현은 단순한 명예욕이 아닙니다.
원문에 따르면 이 문장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어요.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 이름을 내자.”

즉, 종족의 생존과 안전을 위해
자기들만의 성읍과 탑, 다시 말해 자기 보호를 위한 종교 체계를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벨탑이 우상숭배인 이유예요.



‘흩어지라’는 창조의 질서

하나님은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세기 1:28)

‘충만하라’는 말은 직역하면 ‘흩어지라’는 뜻이에요.
이 명령은 선교적 명령이었습니다.

홍수 이후에도 하나님은 같은 명령을 반복하십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세기 9:1)

하지만 바벨탑의 인류는 이렇게 말합니다.
“흩어짐을 면하자.”

이는 명백히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어요.



소통의 붕괴

하나님은 결국 개입하십니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창세기 11:7)

성경에서 가장 무서운 재앙 중 하나는 소통의 단절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가장 먼저 무너진 것도 하나님과의 소통이었어요.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세대 간에도 우리는 이미 그 단절을 경험하고 있지요.



흩어짐, 심판이자 회복의 시작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창세기 11:8)

언어의 혼잡은 인간의 반역을 멈추게 했고,
동시에 하나님의 원래 명령인 ‘흩어짐’을 회복시켰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창세기 11:9)


 

성령으로 다시 이어진 소통

이 바벨의 저주는 신약에서 회복됩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사도행전 2:1)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4)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 모국어로 복음을 듣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사도행전 2:8)

바벨에서 무너졌던 소통이,
성령 안에서 다시 회복된 순간이었습니다.



오늘의 교회, 오늘의 사명

예수님도 같은 명령을 남기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 1:8)

교회의 본업은 분명합니다.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것이에요.

언어를 배워서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통하기 때문에 소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9장을 쓰는 사람들

이제 사도행전은 28장에서 끝났지만,
그 다음 장은 오늘을 사는 교회와 성도가 써 내려가야 합니다.

어둠의 땅에서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영혼들을 향해,
다시 가슴 뜨겁게 길을 떠나는 교회.

올해, 그 사명을 회복하는 걸음이
우리 모두의 삶 속에서 다시 시작되기를 소망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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