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22)-천지의 주재되시는 하나님 (창세기 14:17-24)


창세기 강해(22)-천지의 주재되시는 하나님(창 14:17-24)

이 글은 송태근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 중 22번째
'천지의 주재되시는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 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십일조, 구속사적 메세지

오늘 본문을 읽다 보면 성경에서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장면이 등장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 오늘도 결국 헌금 이야기겠구나.”
“십일조 열심히 내라는 말씀이겠지.”

물론 헌금은 정성을 다해 드리는 것이 맞아요. 그러나 오늘 창세기 14장에 등장하는 십일조는, 헌금이라는 행위 자체에 목적이 있는 본문이 아니에요. 이 본문은 훨씬 더 깊은, 구속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전쟁의 배경과 롯의 위기

창세기 14장의 배경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이미 앞선 말씀에서 아브라함과 롯은 분가했고, 롯은 소돔과 고모라 근처로 이주해 그 땅에 거주하게 됩니다.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창세기 14:12)

이 지역은 고대 근동에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기 때문에, 여러 족장들이 끊임없이 탐내던 곳이었어요. 결국 네 명의 왕과 다섯 명의 왕이 맞붙는, 오늘날로 치면 고대 중동의 대규모 전쟁이 벌어집니다.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이 곧 그 다섯 왕과 맞서니라”
(창세기 14:9)

이 전쟁 속에서 아무런 힘도 없던 롯은, 말 그대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듯 모든 것을 잃고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무모해 보이는 선택, 결과

롯이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318명의 가신을 데리고 전쟁터로 뛰어듭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말이 되지 않는 선택이에요. 수많은 나라가 얽힌 전쟁에, 고작 318명으로 뛰어드는 것은 무모해 보일 수밖에 없죠.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창세기 14:14–16)

아브라함은 완전한 승리와 회복을 경험하고 돌아옵니다.



승리 후 마중 나온 두 왕

승리를 안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맞이하기 위해 두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소돔 왕,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살렘 왕 멜기세덱입니다. 고대부터 전쟁에서 돌아오는 승리자를 맞이하는 의식은 매우 중요했어요. 오늘날에도 군대가 큰 작전을 마치고 귀환하면 국가 지도자가 직접 환영하는 전통이 남아 있죠.

이제 중요한 것은, 이 두 사람이 건넨 환영사의 내용이에요.



멜기세덱의 환영사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창세기 14:18)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축복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창세기 14:19–20)

여기서 핵심 단어는 “천지의 주재”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절대적인 주권자라는 뜻이에요. 아브라함의 승리가 그의 능력, 전략, 병력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짚어 줍니다.



찬송과 감사

성경에서 찬송은 곧 감사와 같은 의미로 사용돼요.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는 말은,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선언입니다.

이 고백을 들은 아브라함이 취한 행동은 이것이었어요.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세기 14:20)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십일조입니다. 중요한 질문이 여기서 나옵니다.

십일조는 율법입니까, 감사입니까?

답은 분명합니다.
십일조는 율법이 아니라 감사의 표현입니다.



‘10분의 1’이 아니라 ‘전부의 고백’

우리는 흔히 십일조를 산술적으로 이해해요.
“10분의 1을 떼어 드리면 나머지 9는 내 것”이라고 생각하죠.

그러나 히브리 사고에서 ‘첫 것’은 나머지 전체를 대표합니다.
첫 것을 드렸다는 것은, 전부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고백이에요.

십일조 안에는 이런 고백이 담겨 있어요.
“이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남은 것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겠습니다.”



멜기세덱의 정체와 그리스도의 그림자

히브리서는 멜기세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히브리서 7:1–2)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의, 그 다음 평강이에요.

의가 먼저 세워지지 않으면 평강은 올 수 없어요.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가 먼저 드러났고, 그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평강이 회복되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드린 십일조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고백이었어요.



하나님이 먼저 십일조를 드리셨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첫 열매”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전부를 먼저 내어주셨습니다.

십일조는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바쳐서 복을 얻는 조건이 아니에요.
이미 모든 것을 내어주신 하나님 앞에서, 감사로 드려지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소돔 왕의 제안과 아브라함의 선택

전쟁 후, 소돔 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창세기 14:21)

그러나 아브라함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14:22–23)

이 고백은 멜기세덱에게서 배운 신앙의 결론이에요.
“나를 부요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안에 공존하는 두 음성

사실 이 두 음성은 지금도 우리 안에 공존합니다.
소돔 왕의 음성과, 멜기세덱의 음성.

“그거 벌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건 네가 수고해서 얻은 거야.”

그리고 또 하나의 음성.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 갈등은 물질의 문제를 넘어, 우리 인생 전체에서 반복되는 신앙의 싸움이에요.



하나님이면 충분합니다

오늘 본문은 헌금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 신앙의 고백이 어디에 걸려 있는가를 묻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기도 하시고, 거두어 가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 속에서 고백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면 충분합니다.”

이 고백이 말이 아니라,
우리 삶의 깊은 중심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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