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61)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창세기 50:1-21)

죽음으로 완성되는 이야기
창세기 50장은 구조부터 의미심장합니다. 이 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어요. 첫 번째는 야곱의 죽음, 두 번째는 야곱 사후에 이루어지는 요셉과 형들 사이의 진정한 화해, 그리고 세 번째는 요셉의 죽음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구조가 마치 샌드위치처럼 되어 있다는 거예요. 야곱의 죽음과 요셉의 죽음 사이에, 형제 간의 화해라는 이야기가 끼워져 있습니다.
이 구조를 문법적으로, 문학적으로 바라보면 창세기 50장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가운데에 놓인 이야기, 곧 요셉과 형들 사이에서 완성되는 용서와 관계 회복이 이 장의 본론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이 본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잠시 시선을 넓혀 창세기 전체의 큰 흐름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창조에서 회복까지
창세기는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되는 책입니다. 이 창조는 완벽했고, 이상적이었으며, 아름다웠습니다. 이 창조는 하나님의 계획이자 하나님의 꿈이었어요.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 이 꿈은 무너집니다. 성경 전체의 구조는 분명합니다. 창조 – 타락 – 구속 – 회복, 이 네 개의 기둥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어요.
창세기 역시 이 틀을 그대로 따릅니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인류의 원역사, 곧 인간이 얼마나 철저하게 타락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12장에 이르러 하나님은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바로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어떻게 한 사람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서막이에요.
이후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의 이야기는 한 택함 받은 성도를 어떻게 하나님께서 완성으로 이끌어 가시는지를 보여주는 긴 여정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이야기는 단순히 요셉 개인의 성공담이 아니라, 야곱의 족보, 곧 야곱의 톨레돗 이야기의 완성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큰 틀을 마음에 담고, 야곱의 마지막 장면을 바라보게 됩니다.
야곱의 죽음, 왕의 장례를 치르다
야곱의 인생은 파란만장했습니다. 속이고, 도망치고, 상처 입고, 다듬어지는 험악한 세월이었어요. 그리고 마침내 그 인생이 끝납니다.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요셉이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다는 사실은 요셉에게도, 야곱에게도 큰 은혜입니다. 부모의 임종을 지킨다는 것은 큰 복이에요.
이제 장례가 시작됩니다.
“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성경에서 미이라 처리를 받은 인물은 단 두 사람입니다. 야곱과 요셉입니다. 미이라 처리는 아무나 받을 수 있는 장례가 아니에요. 왕이나 왕에 준하는 인물에게만 허락된 장례 방식이었습니다.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미이라 처리에는 40일, 애곡 기간은 30일, 총 70일이 걸렸습니다. 이는 성경 기자가 야곱이 애굽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인 기록입니다. 나그네로 들어왔지만, 그는 왕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요셉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분명히 보게 됩니다. 누구 때문에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이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요셉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서 있습니다.
올라가다
장례 이후 요셉은 바로에게 요청을 합니다.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여기서 반복되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올라가다’라는 표현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알라’인데, 전형적인 출애굽 용어입니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갈 때는 언제나 ‘올라간다’고 표현합니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이 장면은 무엇을 떠올리게 합니까? 400년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출애굽하는 장면과 정확히 겹칩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 장례 속에 출애굽의 모판을 심어 두셨습니다.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이미 역사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죽어서야 애굽을 떠난 야곱
“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러…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야곱은 죽어서야 애굽을 떠납니다. 이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복입니다. 홍해 사건을 떠올려 보세요. 애굽 쪽에서 보면 홍해로 들어가는 것은 죽음이지만, 가나안 쪽에서 보면 홍해에서 나오는 것은 생명입니다.
야곱은 육신의 장막을 벗고,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갑니다. 애굽 전역이 함께 울었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최고의 대제국 애굽도 죽음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깨달은 복의 정체
야곱은 죽기 전 요셉을 축복합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요셉의 가지가 담을 넘었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열방으로 흘러갈 생명의 복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분명히 고백합니다.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야곱은 더 이상 자신의 힘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인생을 관통한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진짜 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진짜 성숙은 복의 정의가 바뀌는 것입니다.
비로소 완성된 용서
야곱이 죽자 형들은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그리고 마침내 요셉 앞에 엎드립니다.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이에 대한 요셉의 대답은 창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명언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요셉은 이미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았습니다. 문제는 형들이었습니다. 용서받았지만, 스스로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어요. 용서는 받을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때 완성됩니다.
요셉의 죽음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요셉의 죽음에는 울음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요셉은 그리스도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음은 슬픔의 죽음이 아니라, 소망의 죽음이었습니다.
요셉의 장례는 여호수아 24장에서야 끝이 납니다.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긴 장례였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여기서 말하는 ‘선’, 히브리어 토브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 최고의 토브는 십자가입니다. 인간의 악의 절정이었던 십자가를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의 도구로 바꾸셨습니다.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결국 십자가 앞으로 밀려갑니다. 거기에 붙들리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삶을 선으로 바꾸고 계십니다.
이것이 창세기 50장이 말하는 이야기입니다.
한 인간의 죽음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완성되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