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57) 하나님의 사랑의 설계 (창세기 46:1-7)

이스라엘
이제 머지않아 야곱과 요셉은 얼굴과 얼굴로 꿈같은 만남을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만남으로 들어가기 전에, 본문은 우리 시선을 한 번 멈추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여기서 야곱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불립니다. 이 이름은 얍복강가에서 받은 이름입니다. 혹독하고 고뇌의 밤, 어떤 사람과 씨름하다가 그분이 하나님의 현현임을 알아채고, 환도뼈가 부러지는 사건 속에서 주어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이후 야곱을 늘 이스라엘로만 부르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야곱, 어떤 때는 이스라엘로 뒤섞어 부릅니다. 그것은 야곱이 언제나 이스라엘답게 성숙한 모습만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에서는 분명히 ‘이스라엘’이라 부릅니다. 이는 야곱 개인의 완성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장면은 개인사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대표하는 언약 공동체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름은 성품의 성숙이 아니라 대표성의 호칭입니다.
브엘세바에서 멈춘 이유
야곱은 지금 애굽을 향하고 있습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요셉이 살아 있을 뿐 아니라, 그 시대 대제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게다가 아직 기근이 5년이나 남았으니 내려오라는 요청까지 받았습니다. 상식적으로는 한 걸음에 달려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브엘세바에서 멈춥니다.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브엘세바는 아브라함부터 이삭, 야곱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결단의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서던 자리였습니다. 이곳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세대를 관통해 공유된 신앙의 장소였습니다.
야곱은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묻습니다. 기쁜 소식이 있었지만, 그 마음 한편에는 두려움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 두려움이 무엇인지는 다음 절에서 드러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은 야곱을 두 번 부르십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자체가 야곱의 마음에 두려움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이 두려움은 요셉 때문이 아닙니다. 아들이 살아 있고, 총리가 되어 있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이 두려움은 이 길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야곱의 삶을 돌아보면 이 변화는 분명합니다. 그는 평생 목표가 보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움켜쥐던 사람이었습니다. 발꿈치를 잡는 자라는 이름처럼 자기 방식으로 인생을 밀어붙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멈춥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이 길이 정말 하나님의 뜻입니까?”
이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실패와 상실, 속임과 속임당함, 모진 세월 속에서 조금씩 깎이고 빚어져 만들어진 변화입니다. 이제 야곱은 인생의 끝자락에 서서, ‘잘됨’보다 ‘뜻’을 먼저 묻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내려가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이 말씀을 읽다 보면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왜 어떤 때는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 하시고, 어떤 때는 내려가라 하시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애굽이냐 가나안이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라 하신 길인가, 말라 하신 길인가가 중요합니다. 내려가지 말라면 내려가지 않는 것이 옳고, 내려가라면 내려가는 것이 옳습니다. 옳음의 기준은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 애굽은 하나님 대신 의지하려는 마음을 드러내는 시험의 자리였기에 막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야곱의 경우는 다릅니다. 이때는 내려가지 않으면 오히려 언약 백성이 무너질 상황이었습니다.
구별되이
야곱의 열두 아들 이야기를 돌아보면, 반복해서 등장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 가나안 문화, 우상숭배와의 연결입니다. 가정 안에 범죄와 붕괴가 이어졌고, 혼합주의는 이미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남은 자로서 이 백성을 보호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에서 빼내야 했고,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신 것입니다. 더 타락한 땅이지만, 섞이지 않고 구별되어 살 수 있는 자리를 예비하셨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고센이었습니다.
고센, 보호의 울타리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요셉은 가족들에게 분명히 말하게 합니다. 우리는 목축업자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애굽에서 소와 송아지는 신이었고, 목축업자는 그 신을 잡고 죽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멸시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멸시는 결과적으로 보호가 되었습니다. 애굽 중심 문화로부터 떨어져 고센 땅에 정착하게 되었고, 그곳은 목축에 가장 적합한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섞이지 않게 하시되,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혹독한 기근
이 기근이 조금만 덜했어도,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버텨보려 했을 것입니다. 가나안 혼합주의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보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근은 사람의 손을 떠날 정도로 혹독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손을 놓게 됩니다.
그때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가장 고상한 지혜가 터져 나옵니다. “아버지, 저를 살려주십시오.” 인간의 가장 큰 지혜는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70명과 75명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이 두 숫자는 서로 틀린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세었는가의 차이입니다.
창세기는 “야곱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온 사람들”을 기록합니다. 그래서 70명입니다.
사도행전은 “이미 애굽에 있던 요셉의 가족까지 포함한 전체 가족”을 말합니다. 그래서 75명입니다.
스데반은 요셉을 단순히 먼저 가 있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미리 보내신 사람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가족까지 포함해 야곱의 집을 하나의 공동체로 본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이름을 빠짐없이 기록하려는 책이 아닙니다. 구원사적으로 필요한 흐름을 기록합니다.
유다를 미리 보내어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여기서 이야기의 중심이 바뀝니다. 요셉에서 유다로 이동합니다. 요셉과 야곱의 만남을 가능하게 만든 중재자,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베냐민을 책임졌던 사람이 유다입니다.
이 전환은 우연이 아닙니다. 메시아가 유다 지파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구속사의 방향이 이미 이 지점에서 드러납니다.
해후의 눈물
“그의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이 만남은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수십 년의 세월이 이 한 문장 안에 담겨 있습니다. 상실과 죄책감, 사랑과 용서가 눈물로 터져 나오는 순간입니다.
만약 요셉이 바로 앞에서 형들을 고발했다면, 이런 보호와 혜택이 가능했을까요.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바로는 기뻐하며 그들을 맞이했고, 고센을 내주었습니다.
이 장면은 구원의 그림입니다. 우리는 죄의 대가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는 화해가 이루어지고, 상까지 받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이 하신 일이었음을, 십자가의 공로였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