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35)-하나님의 깊은 손길(창세기 26:1-15)

흙 묻은 운동화
오늘은 창세기 26장을 마무리하며 한 장면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해요.
이 영화의 한 평론가는 20여 년 전,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저 신발을 이렇게 해석했다고 해요.
“저건 IQ 75를 상징하는 신발이구나.”
그런데 20년이 지난 뒤, 다시 이 영화를 보며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고 합니다.
불편한 다리, 정상적이지 못한 몸, 사회의 냉대와 편견 속에서 얼마나 외롭고 고단하게 살아왔을까.
흙 묻은 운동화는 그의 어리석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걸어온 인생의 무게를 대변하는 표정이었던 것이죠.
이렇게 시간이 지나며 시선이 바뀌는 것을 우리는 보통 성장, 변화, 혹은 성숙이라고 부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예요.
20대에 만난 하나님, 30대에 만난 하나님, 50대에 만난 하나님은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이 변화와 성숙은 신앙인이 반드시 붙들어야 할 중요한 가치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의 닮은 이야기
창세기 26장을 읽다 보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본문의 이야기가 너무나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닮아 있다는 점이에요.
아버지도 거짓말을 했고,
아들도 거짓말을 합니다.
아버지의 연약함이 그대로 아들의 연약함으로 반복됩니다.
성경 기자는 왜 이런 사건을 반복해서 기록했을까요?
성경은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사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표정을 보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의 치부를, 넘어짐을, 실수를 이렇게 여과 없이 반복해서 보여주실까요?
저는 여기서 한 단어를 봅니다.
“이게 인간이다.”
불과 며칠 전, 혹은 한 달 전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결단했던 기도 제목이 여전히 반복되고,
또다시 같은 제목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우리의 모습.
그게 인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전함’의 의미
우리는 종종 온전함을 완벽함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온전함은 퍼펙트함이 아닙니다.
성경적 온전함이란,
연약하고 부족하고 넘어졌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방향을 틀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미 수백 번은 하나님 앞에서 떨어져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인생이
오늘도 여전히 그분 앞에 머물러 앉아 있다면,
그 자체가 은혜의 기적입니다.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였다
이제 본문 5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창세기 26:5)
이 말씀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브라함은 늘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완벽함을 칭찬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이 말은 이런 뜻이에요.
비록 지금 이삭이 거짓말로 넘어졌고 연약함이 드러났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다루셨던 것처럼
이삭의 인생도 끝까지 빚어 가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아버지를 통해 이미 증명하신 하나님의 방식으로
아들을 다시 한 번 안심시키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다루시는 방식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차이를 하나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을 같은 방식으로 다루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도록 허락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는 하나님이 바로보다 크신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반면 이삭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이삭에게 주어진 메시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목축업자였음에도 농사를 짓게 됩니다.
그 해에 백 배를 얻었더라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창세기 26:12)
여기서 ‘백 배’는 단순한 수치 개념이 아닙니다.
이삭은 원래 농부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원문은 ‘농사했다’기보다 “씨를 뿌렸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리고 그 반대 동작은 거두다입니다.
공동번역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삭은 그 땅에 씨를 뿌려 그 해의 수확을 백 배나 올렸다. 야훼께서 이렇듯 복을 내리셨다.”
결론은 분명합니다.
뿌렸고, 거두었고, 그 모든 과정의 주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복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지는 도깨비방망이가 아닙니다.
뿌림에는 기다림이 있고,
기다림에는 불안이 있고,
그 모든 밤을 통과한 끝에
마침내 열매를 거두는 것이 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창세기 26:13)
‘마침내’라는 말은
천천히, 서서히, 과정을 통과했다는 뜻입니다.
탄식은 도피가 아니라 그리움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고린도후서 5:2)
성경에서 말하는 탄식은 부정이 아닙니다.
그리움입니다.
상사병 같은 갈망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싫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분을 더 갈망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우물을 파는 신앙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창세기 26:18)
이삭은 싸우지 않습니다.
물러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팠던 우물을 다시 팝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맡기고 다시 파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드러냄
마침내 블레셋 사람들이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창세기 26:28)
그들은 이삭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이삭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신앙의 영광입니다.
맺음말
백 배를 주시기도 하시고,
어느 날은 모두 거두어 가시기도 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그 모든 과정 속에서
결국 한 가지를 알게 하십니다.
주님이 함께하심이 복이다.
이 고백이 오늘 우리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하나님을 더 간절히 향하는 복된 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