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50) 잊혀진 요셉 (창세기 40:1-23)

형통의 은혜
우리는 오늘 감옥에 있는 요셉을 바라보게 됩니다. 성경은 이 장면에서도 분명하게 말합니다. 요셉은 여전히 형통한 사람이라고요. 여기서 말하는 형통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성공이나 번영의 개념이 아닙니다. 히브리어로 ‘찰라흐’라고 불리는 이 형통은, 하나님의 계획이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진행되고 완성되는 상태를 뜻해요.
그런데 이 형통 앞에는 언제나 따라붙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함께 하심”이에요. 누가 누구와 함께합니까?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이 차이를 놓치면 성경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져요.
히브리어 전치사 ‘에트’는 사람 쪽에 주도권이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이 ‘함께’는 언제나 하나님 쪽에 주권이 있어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동행의 대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행
성경은 노아를 이렇게 기억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자라고요. 에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동행’이라는 말 역시 같은 개념이에요. 내가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이 관점은 베드로를 보면 더 선명해져요. 베드로는 성경에 기록된 것만 보아도 여러 차례 부름을 받은 인물입니다. 넘어지고, 다시 부름받고, 또 실패하고, 다시 세워집니다. 그 안에는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어요.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을 지나치게 인본주의적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그가 고난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서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성품이나 인내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이에요.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가 주님과 나란히 걷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 허리춤을 붙잡고 계신 겁니다. 주님이 떠나시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십자가의 보혈이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설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함께하시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해서 인생이 항상 꽃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언덕 위에 홀로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야 하는 순간들이 더 많아요.
요셉의 감옥 생활을 계산해 보면 그렇습니다. 그는 열일곱 살에 애굽으로 끌려왔습니다. 그리고 서른 살에 총리가 되지요. 감옥에서 풀려난 것은 그보다 2년 전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최소한 5년 이상을 감옥에서 보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열일곱 살이면 아직 어른도 아닙니다. 게다가 그는 아버지 야곱의 각별한 사랑을 받던 아들이었어요. 그런 그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은전 스무 개에 팔려 먼 타국으로 끌려갔습니다. 종으로요.
그 심정이 어땠을까요.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죄를 피했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강간미수범이라는 누명이었고, 감옥이었습니다.
드러나는 하나님의 섭리
오늘 본문에는 아주 의미심장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
이 친위대장은 보디발입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보디발은 요셉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아내와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에 풀어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 요셉에게 최고위 관원들을 섬기게 합니다. 억울한 상황이지만, 그 안에서도 하나님은 요셉을 사용하고 계셨습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어느 날 두 관원장이 꿈을 꿉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의 얼굴빛이 달라진 것을 알아봅니다.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요셉은 묻습니다.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그리고 그 유명한 고백을 합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이 말은 요셉의 신앙 고백이에요. 이 시기는 아직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던 시대입니다. 하나님은 꿈과 환상으로 뜻을 계시하시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릅니다. 성경 외에 다른 계시는 없습니다.
신명기는 이 부분을 아주 분명히 경고합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 청종하지 말라”
성경은 언제나 성경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감추어진 시간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 간절히 부탁합니다.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그러나 결과는 이렇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무려 2년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성경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지만,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잊게 하신 것입니다.
그 2년은 요셉에게는 잊혀진 계절이었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히든 타임, 감추어진 시간이었습니다. 혼란과 숙청이 반복되던 시대 속에서, 하나님은 요셉을 감옥이라는 안전한 장소에 생명싸개로 숨기셔서 보호하셨습니다.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도록요.
어느 날 갑자기
정확히 2년 후, 모든 정세가 안정되었을 때 하나님은 바로에게 꿈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때,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던 그 꿈 앞에서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해 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늘 그렇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지금 혹시 요셉과 같은 시간을 지나고 있다면, 잊지 마세요.
지금은 버려진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히든 타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