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1)-가인의 후예 (창세기 4:16-26)


창세기 강해 11-가인의 후예 (창세기 4:16-26)

이 내용은 송태근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
"가인의 후예"라는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 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오늘의 제목, 가인의 후예

오늘 제목은 「가인의 후예」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인 대가를 하나님으로부터 명확하게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벌을 내리시되, 한 가지 조건을 덧붙이십니다. “네 생명은 보호해 주겠다. 누군가 너를 보복하면, 내가 일곱 배로 갚겠다.” 그렇게 약속을 받고 가인은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 기자는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창세기 4장 16절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이 한 문장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과연 하나님 앞을 떠난 인간의 인생 행로는 어떻게 흘러가며, 그 결말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가인의 길 속에서 놀랍게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다

가인이 떠난 방향은 “에덴 동쪽”입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났을 때도 향했던 방향이 바로 이 에덴 동쪽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인은 놋 땅에 거주합니다.
성경 각주를 보면 ‘’이라는 말은 ‘유리하다’, ‘방황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선고하신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장 12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가인의 직업은 농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더 이상 농사로는 살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그 결과는 명확합니다. 방황하는 삶, 떠도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첫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을 쌓다, 하나님의 벌에 대한 도전

그런데 17절을 보면 놀라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4장 17절
“가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가인은 놋 땅에서 성을 쌓습니다.
성을 쌓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벌을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아니라, 정면으로 거부하고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성은 “내 운명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가인은 그 보호조차 필요 없다고 말하듯 성을 쌓습니다.

여기서 인류의 도시 문명, 인간 문명의 기원이 시작됩니다.



에녹, 책임의식이 왜곡되다

가인이 성을 쌓은 시점은 에녹을 낳은 이후입니다.
에녹이라는 이름의 뜻은 ‘가르치다, 전파하다’입니다.

자식을 낳기 전과 낳은 후, 인간이 인생을 해석하는 방식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종족 보존이라는 본능 앞에서 가인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자리 잡습니다.
“이제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분명히 말합니다.

시편 127편 3절
“자식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자식도 내 소유가 아닙니다.
가인은 사실 회복의 경계선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벌을 받아들이며 돌이킬 수 있는 지점이었습니다.



경계선 앞에서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

인생에는 반드시 경계선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리멘’이라 부르며, 여기서 ‘리밋(limit)’, 즉 한계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경계선에 설 때, 인간은 반드시 한 가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유일하게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서 벗어날 때 성경은 그것을 라고 부릅니다.

‘죄(하말티아)’란 과녁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가인은 이 질문을 묻지 않았고, 그 대신 성을 쌓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단절, 관계의 파괴를 의미합니다. 



성은 단절을 낳는다

성은 “너는 너고, 나는 나다”라는 선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은 소통 기술이 가장 발달한 시대이지만, 동시에 가장 불통의 시대입니다.

성은 인간을 분석하고 평가하고 서열화합니다.
인간을 관계가 아니라 기능과 가치로만 바라보게 합니다.



라멕, 가인의 후손의 절정

성경은 가인의 족보를 이어서 기록합니다.

창세기 4장 18절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이 라멕이 가인의 후예의 절정입니다.



가정의 붕괴, 두 아내를 맞다

창세기 4장 19절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에덴에서 시작된 가정 질서가 무너집니다.
성경에서 집과 성은 같은 단어 ‘베이트’를 씁니다.

그런데 성을 지키려다 가정이 무너집니다.

시편 127편 1–2절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헛되다’가 세 번 반복됩니다. 완전한 헛됨입니다.



문명은 발달했으나 인간은 행복해졌는가

라멕의 자손들은 문명을 발전시킵니다.

창세기 4장 20절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세기 4장 21절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목축, 예술, 문화가 발전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부가 축적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결국 등장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창세기 4장 22절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원문에 따르면 이는 무기 제작자입니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전쟁은 일상이 됩니다.



라멕의 노래, 자랑이 된 살인

창세기 4장 23절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은 사람을 죽인 일을 노래로 자랑합니다.
자비(Compassion)가 사라진 사회입니다.

그리고 그는 말합니다.

창세기 4장 24절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이 말은 하나님이 아니라 라멕 자신이 한 말입니다.
이제 성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절망으로 끝날 것 같지만 성경은 여기서 복음으로 전환됩니다.

창세기 4장 25절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창세기 4장 26절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셋의 후손을 통해 예배가 회복됩니다.

그리고 셋의 계보 속에도 라멕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5장 28절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노아라 하였더라”

노아를 통해 하나님은 인류를 보존하십니다.



성이 아니라 예수만이 피난처입니다

성은 피난처가 아닙니다.
문명도, 권력도, 성취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피난처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인류를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늘도 셋의 계보처럼, 은혜는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만이 여러분의 피난처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댓글 쓰기

다음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