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34)-명분과 실리(창세기 25:19-34)

인생의 중심
며칠 전 눈길을 끄는 뉴스 하나가 있었습니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 입학 에세이와 관련된 이야기였어요. 방글라데시 출신의 한 흑인 소년, 무슬림 가정에서 자란 지하드 아메드는 에세이에 단 한 문장만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 문장을 무려 백 번 반복해서 제출했다고 합니다.
출제된 질문은 이랬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며,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이 소년의 답은 단순했습니다.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이 한 문장을 그는 백 번 썼습니다. 단어를 바꾼 것도, 문장을 늘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같은 문장 하나를 반복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이 문제는 이 소년에게 ‘현실’이었고, 가장 절실한 삶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 진정성이 입학사정관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결국 그는 명문대에 합격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명문대 합격’이 아닙니다.
사람은 적어도 “나는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사는가”에 대한 답 하나쯤은 품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과연 한 문장으로 무엇을 쓸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 정리의 시간
이 질문을 품고 오늘 우리는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그 배경에는 아브라함의 마지막 인생 장면이 놓여 있습니다.
창세기 25장에서 아브라함은 175세로 생을 마칩니다.
그는 75세에 고향을 떠났고, 이후 100년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성경은 그의 인생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 이름은 그두라라.”
(창세기 25:1)
그두라는 ‘향기 나는 여자’라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잃은 후, 삶을 다시 정돈하며 이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그는 다가오는 죽음을 직감하듯 재산을 정리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산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하여금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쪽 땅으로 가게 하였더라.”
(창세기 25:5~6)
여기서 이삭에게 준 것은 ‘소유’이고, 서자들에게 준 것은 ‘혜택’에 가깝습니다.
아브라함은 혹시 모를 갈등을 미리 차단하며, 질서 있게 삶을 정리합니다.
기운이 다하여 죽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죽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그가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창세기 25:7~8)
이 표현은 단순히 ‘늙어서 힘없이 죽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원문에 가까운 뜻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인생을 충분히 누리고,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
복된 죽음이란 아프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삶의 몫을 다 감당했는가, 그 여부가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떠남’의 의미
사도 바울 역시 죽음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디모데후서 4:6~7)
여기서 ‘떠나다’는 말은 죽음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로마 군인들이 전쟁이 끝난 후 텐트를 걷는 장면에서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병사들은 텐트를 고정하던 줄을 풉니다.
줄이 풀리는 순간, 텐트는 자연스럽게 무너집니다.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귀향을 위한 준비입니다.
바울은 죽음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고단한 육신의 삶을 마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설렘 말입니다.
이삭이 받은 복
성경은 아브라함이 죽은 후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창세기 25:11)
그런데 현실을 보면 이상합니다.
이삭은 마흔에 결혼했고, 예순이 되어서야 자식을 얻습니다.
무려 20년 동안 아무 열매도 없습니다.
반면, 이스마엘과 아브라함의 다른 자손들은 계속 번성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에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바닥까지 데려가셔서, 인간의 가능성을 완전히 내려놓게 하신 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붙들게 하십니다.
명분과 실리의 갈림길
이제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창세기 25:29~30)
야곱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창세기 25:31)
에서의 반응은 분명합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창세기 25:32)
결국 그는 명분을 팥죽 한 그릇과 바꿉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창세기 25:34)
신약은 이 선택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히브리서 12:16)
야곱은 사랑하고,
사도 바울은 이 이야기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로마서 9:11~13)
이 말씀은 감정적인 사랑과 미움이 아니라
택하심과 유기의 언어입니다.
야곱은 비열해 보일 정도로 명분을 붙잡았고,
그 대가로 험악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내 일생이 험악한 세월이었나이다.”
(창세기 47:9)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 복의 개념이 완전히 바뀝니다.
복의 정의가 바뀐 사람
야곱은 말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축복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창세기 49:26)
물질로 보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깊이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복이란
땅의 확장이 아니라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만났는가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질문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나는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는가.
실리 앞에서 명분을 내려놓고 있지는 않은가.
내 인생을 한 문장으로 쓴다면, 무엇이 남을까.
오늘의 예배가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밤이 되기를,
홍해가 갈라지는 믿음의 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