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25)-할례와 십자가 (창세기 17:1-14)


창세기 강해(25)-할례와 십자가 (창세기 17:1-14)

이 글은 송태근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 25번째
할례와 십자가라는 말씀으로 전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해당 영상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박애주의로 포장된 인간에 대한 착각

오래된 영화 한 편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종교 영화로 기억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기독교 신앙을 전하려는 선교 영화라기보다, 인간에 대한 신뢰, 곧 박애주의를 중심에 두고 있는 작품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영화 속에서 가브리엘 신부는 원주민 과라니족 앞에서 창끝이 코앞에 닿아 있는 위협 속에서도 오보에를 연주합니다. 그 장면에서 흐르는 음악이 바로 넬라 판타지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환상 속에서 나는 올바른 세상을 봅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평화롭고 정직하게 살아갑니다.
나는 영원히 자유롭기를 꿈꿉니다.
구름처럼 떠다니며, 영혼 깊이 인간애가 가득한 그곳을.”

가사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주제는 인간애, 다시 말해 인간에 대한 희망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묻습니다.
이 노래는 성가인가, 아니면 일반 노래인가?

그러나 그것이 성가이든 아니든, 더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이 노래와 영화가 전제하고 있는 인간관은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더욱 아이러니합니다. 실제 역사 속 사건을 바탕으로, 포르투갈 군대가 교회까지 쳐들어오고, 가브리엘 신부는 맨몸으로 신자들과 함께 군인들 앞에 섭니다. 그 절박한 순간, 그는 울부짖듯 외칩니다.

“우리는 인간이잖아.”

이 대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명대사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대사만큼 인간에 대해 잘못된 기대를 심어줄 수 있는 말도 드뭅니다.
만일 인간이 그렇게 괜찮은 존재였다면, 왜 그리스도는 갈보리에서 죽으셔야 했을까요?



창세기 17장, 구약의 갈보리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창세기 17장은, 인간의 실체를 가장 정직하게 드러내는 본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본문이야말로 구약의 갈보리라 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세기 17:1)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은 나이는 86세였습니다. 그로부터 13년간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그 긴 침묵을 깨고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이 짧은 한 절 안에서 세 마디를 하십니다. 이 세 마디는 오늘 기도하는 모든 성도가 반드시 붙들어야 할 선언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하나님은 먼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히브리어로 이 표현은 엘 샤다이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힘이 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얼마나 깊이 개입하시는 분인가를 가장 풍성하게 담아낸 이름입니다.

첫째, 엘 샤다이는 ‘기르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을 포함합니다.
부모가 아이를 낳는 것으로 책임이 끝나지 않듯, 하나님은 부르신 인생을 반드시 끝까지 양육하시는 분이십니다.

둘째, 그 양육은 하나님의 계획으로 채워지는 과정입니다.
구원은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시간과 사건과 관계 속에서 빼곡히 채워지는 여정입니다. 기쁨도, 상실도,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의 골짜기도 모두 하나님의 채우심 안에 있습니다.

셋째, 엘 샤다이는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이 능력은 우리가 기대하는 세상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3)

이 말은 성공의 선언이 아니라, 빈궁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고백입니다.



기다림의 싸움

이 선언이 주어진 시점은 매우 절묘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약속이 더디게 이루어지자, 자신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 태어났습니다.

칼빈은 말했습니다.
“신앙은 기다림의 싸움이다.”

우리가 기다리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역사는 언제나 기다림의 역사였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갈라디아서 4:4)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기다림의 싸움에서 실패했습니다. 그 지점에서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십니다.



“내 앞에서 행하라”–위치의 문제

두 번째 선언은 이것입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이 말은 위치에 대한 명령입니다.
아이들이 가장 안전한 곳은 부모의 입니다. 시선에서 벗어나는 순간 사고가 일어납니다.

“내 앞에서 행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시선 안에 머물라는 뜻입니다.
삶의 방향과 기준을 하나님 앞에 두라는 요청입니다.



퍼펙트가 아닌 온전함

세 번째 선언은 이렇습니다.

“완전하라”

성경이 말하는 완전함은 결코 흠 없는 퍼펙트함이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온전함은 약한 그대로 하나님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탕자가 온전해진 순간은 언제입니까?
잘나서가 아니라,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을 때입니다.

아브라함이 온전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 꾀와 수단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묶이는 것뿐이었습니다.



할례, 죽음을 통한 약속의 시작

하나님은 언약을 다시 말씀하시며 할례를 명하십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창세기 17:10)

할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닙니다.
그 의미는 분명합니다. 너는 육체적으로 끝났다. 죽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통해 상징적으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태어난 자손이 누구입니까? 이삭입니다. 성경은 이삭을 단순히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지 않고, 약속의 자손이라 부릅니다.

이 할례는 오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미리 보여주는 구약의 표징이었습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로마서 2:28–29)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빌립보서 3:3)

“그 안에서 너희가 …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골로새서 2:11)

그리스도의 할례란, 십자가에서의 죽음입니다.



이름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해학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사래의 이름을 사라로 바꾸십니다.
자식 하나 없는 사람에게 “열국의 아버지”, “열국의 어머니”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해학입니다.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이름,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이름으로 불러 가십니다.

베드로도 그렇습니다. 흔들리는 시몬을 향해 예수님은 “반석”이라 부르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도, 거룩한 무리라 부르십니다.



은혜였음을 알게 되는 자리

아브라함은 끝까지 믿음의 모범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나이다”
(창세기 17:18)

그러나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다른 아브라함을 만납니다.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공로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천상의 예배에서 장로들이 면류관을 벗어 어린양 앞에 던지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 그분의 우격다짐 같은 은혜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가는 싸움

신앙이 깊어진다는 말은, 더 많은 업적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십자가 앞으로 한 걸음씩 가까이 가는 싸움입니다.

창세기 17장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죽음 외에는 설명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늘 우리의 수많은 문제와 눈물과 긴 시간의 질문들이,
모두 십자가 앞에서 다시 해석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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