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3)-육체가 된 인간 (창세기 6:1-8)


창세기 강해(13)-육체가 된 인간 (창세기 6:1-8)

이 글은 송태근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
'육체가 된 인간'이란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 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왜 ‘딸들’일까?

창세기 6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조금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는 문장입니다.
‘자녀들이 났다’라고 해도 충분했을 텐데, 굳이 ‘딸들’이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 표현은 우연이 아니라, 곧이어 등장할 중요한 대조를 위한 포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2절에 등장하는 표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여기서 성경은 분명하게 아들과 딸을 대비하고 있어요.
‘사람의 딸들’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이에요.



“하나님의 아들들”의 해석

이 표현은 성경 해석에서 오래도록 논쟁이 되어온 부분이에요.
대표적으로 세 가지 해석이 제시됩니다.

첫 번째는 천상적 존재, 즉 천사적 존재를 가리킨다는 해석이에요.
성경에는 천사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장면들이 종종 등장하죠.
유대 문학적 배경을 고려하면 전혀 근거 없는 해석은 아닙니다.

하지만 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을 했다고 말해요.
영적인 존재와 육적인 존재의 결합이 과연 논리적으로 가능한가라는 질문 앞에서, 이 해석은 한계를 가집니다.

두 번째 해석은 당시의 권력자, 족장, 지배계층의 후손들을 가리킨다는 견해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힘과 통치권을 가진 자를 신적인 존재로 묘사하는 문화가 있었어요.
그래서 ‘신의 아들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이
실제로는 권력과 기득권을 가진 자들을 의미한다는 해석입니다.

이 해석 역시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본문 전체를 설명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함이 남습니다.

세 번째는 가장 널리 알려진 해석으로,
셋의 경건한 계보와 가인의 타락한 계보의 결합을 말한다는 견해입니다.
곧 하나님의 족보와 세속적 족보의 혼합이라는 설명이에요.

하지만 이 해석 또한 결정적인 근거가 부족합니다.

결국 이 세 가지 해석 모두 각각의 설득력은 있지만, 결정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억지로 하나의 해석으로 규정하기보다,

본문이 강조하려는 핵심에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어요.



‘아름다움을 보았다’는 말의 의미

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은지라”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아름다움’입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에서 자주 등장하는 히브리어 ‘토브(tov)’예요.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할 때 사용된 바로 그 단어입니다.
하나님께 사용될 때 이 ‘토브’는 본질적 선함을 뜻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사용할 때의 ‘토브’는 다릅니다.
이 문맥에서는 속이 아닌 겉의 매력,
다시 말해 보이는 것에 끌림을 의미해요.

직설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그 여인들의 겉모습, 매력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라멕의 두 아내

우리는 이미 창세기 4장에서 라멕을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라멕의 첫 번째 아내 이름은 아다였죠.

‘아다’라는 이름에는
치장하다, 장식하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이것은 라멕이 여성을 선택할 때 무엇을 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선택 기준 역시 겉모습, 꾸밈, 외적인 매력이었어요.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대 전체의 결혼관이자 가치관이었습니다.

사회학자들이 말하듯,
한 시대의 정신과 문화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가
바로 결혼 풍속입니다.

사람들이 배우자를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는지를 보면,
그 사회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여’

이 장면은 창세기 3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여기서도 사용된 단어가 바로 ‘토브’입니다.
최초의 범죄 역시 보이는 것에 대한 욕망에서 시작되었어요.

하나님의 뜻과 중심은 보지 못하고,
겉으로 좋아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긴 결과가
오늘 창세기 6장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겁니다.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3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여기서 말하는 ‘육신’은 단순히 몸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육신은 부패함, 죄성, 하나님과 반대되는 가치관을 뜻해요.

즉, 인간이 전적으로 하나님과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졌다는 선언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은 함께하지 않게 되었고,
인간은 죽음의 운명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떠나신 채로 두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요엘서 2장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하나님은 영을 거두시는 분이 아니라,
다시 부어 주시는 분이세요.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성령 강림을 통해 교회 공동체 위에 성취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죽은 존재가 아니라,
산 영이 된 사람들이에요.



120년이라는 시간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

3절 하반절은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이 구절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홍수까지 남은 유예 기간이 120년이라는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홍수 이후 인간의 평균 수명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지만 이 두 해석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 자체가 아니라,
그 시간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즉각 심판해도 마땅하지만,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므두셀라의 긴 생애가 그러했듯,
이 120년 역시 한 영혼이라도 더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자비의 시간입니다.



세상이 숭배하는 가치

4절은 당시의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여기서 반복되는 키워드는 세 가지입니다.
거인, 용사, 명성.

이것은 세상이 자랑하는 가치의 집합입니다.
강함, 크기, 영향력, 이름이 남는 인생.

그러나 성경의 가치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약한 모습으로 오셨고,
겨자씨 같은 작은 믿음을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의 영이 떠난 세상은
항상 강함의 우상, 크기의 우상, 명성의 우상에 사로잡힙니다.



진노가 아닌 ‘한탄’

5절과 6절을 보면 놀라운 표현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여기에는 분노나 격노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대신 한탄과 근심이라는 말이 사용됩니다.

이 한탄은 후회나 감정적 분노가 아니라,
회복을 고민하는 깊은 고뇌에 가깝습니다.

결국 홍수라는 심판은
파괴를 위한 결정이 아니라,
세상을 다시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세기 6장은 이 한 절로 모든 이야기를 뒤집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심판의 한가운데서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은혜입니다.
노아는 완벽해서 선택된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혼란한 세상 속에서도 예배자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에요.



세상 소망이 사라질 때, 은혜는 시작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세상 소망 다 사라져 가도
주의 사랑은 끝이 없으니
살아가는 이 모든 순간이
주 은혜임을 나는 믿네”

세상 소망이 사라지는 것은 손해가 아닙니다.
그 자리에 십자가의 은혜가 들어오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순간이,
전부 은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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