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53) 죽어도 못 보내? (창세기 42:1-9)

창세기 강해(53) 죽어도 못 보내? (창세기 42:1-9)

이 글은 송태근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
53번째 죽어도 못 보내라는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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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에게로

오늘 말씀 창세기 42장 1절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앞장인 41장 57절을 보겠습니다.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여기에 기록된 기근은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기근이 아닙니다. 실제 고대 역사 기록에도 남아 있을 만큼, 무시무시하고 전대미문의 기근이었습니다. 먹을 양식이 있는 나라는 오직 애굽 하나뿐이었고, 그래서 천하만국의 백성들이 먹을 것을 구하려고 몰려옵니다.

중요한 점은, 사람들이 애굽이라는 나라를 향해 온 것이 아니라 요셉에게로 몰려왔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7년 풍년 동안 저장해 두었던 양식을 그냥 나누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곡식을 주는 대신 땅을 확보했고, 결국 애굽의 모든 토지는 요셉에게로 귀속됩니다. 이것이 기근과 풍년이 교차하던 한 시대에, 요셉이 감당했던 경영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근은 애굽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고향 땅 가나안까지 깊숙이 파고듭니다.



기근을 더 심하게 하심

여기서 한 번 가정해 봅시다. 물론 역사는 가정법을 허락하지 않지만, 생각해 보는 건 가능합니다.
만약 이 기근이 어중간했다면, 이 반전의 이야기가 가능했을까요? 요셉과 가족들이 다시 만나는 이 꿈같은 장면이 가능했을까요? 불가능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기근이 점점 더 심해진다는 점입니다. 형들만 애굽에 내려왔을 때는 그저 처참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베냐민이 요셉에게로 오기 전까지, 하나님은 기근을 더 심하게 하십니다.

성경 기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요?
이 이야기는 사실 요셉의 톨레돗이 아니라, 야곱의 톨레돗입니다.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것

그렇다면 야곱이 지금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요셉을 대신한 존재, 베냐민입니다. 야곱에게 베냐민은 생명줄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전 생애에 걸친 트라우마입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요셉의 형 열 사람이”

형이 열 사람은 맞습니다. 하지만 형제는 열 사람이 아닙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열둘이라면, 요셉을 제외하고 열한 명이 등장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누가 빠졌습니까? 베냐민입니다.

베냐민은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라헬이 낳은 아들이고, 그를 낳는 과정에서 라헬은 산고 끝에 죽습니다. 그러니 베냐민은 야곱에게 더더욱 가슴 아픈 자녀였습니다.



베냐민

3절을 보겠습니다.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은 열 아들을 애굽으로 보냅니다. 당시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은, 돌아다니는 목동의 삶을 살던 이들에게도 목숨을 건 길이었습니다. 그렇게 만만한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위험한 길에 베냐민만 제외됩니다.

야곱에게 베냐민은 요셉의 인생이 그대로 오버랩된 존재였습니다. 야곱은 요셉이 죽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 형들이 짐승의 피를 묻힌 옷을 가져왔고, 야곱은 요셉을 땅에 묻지 못하고 가슴에 묻고 살았습니다.

이것은 야곱에게 평생의 형벌과 같은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 집안의 구조를 잘 생각해 봅시다.
아침마다, 저녁마다 슬픔에 잠긴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해야 했던 형들의 삶은 어땠을까요? 기록은 없지만,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웃음기를 잃은 아버지의 얼굴, 신음과 탄식, 수심이 가득한 눈빛. 그것을 매일 바라보는 삶은 그 자체로 형벌이었습니다.

아마 형들은 이런 마음으로 살았을 겁니다.
‘미쳤지… 우리가 그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아무리 미워도 그렇지, 요셉이 아버지에게 어떤 존재였는데.’
‘그때 르우벤 말 좀 들을 걸…’



여전히 변하지 않는 야곱

4절을 보면, 야곱의 가정에는 이미 샬롬이 없습니다.
요셉이 사라진 이후 이 가정은 깊은 침묵과 적막 속에서, 서로 눈길만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야곱의 인식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요셉이 도단으로 심부름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이유는, 길이 험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야곱 자신에게 실질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로서 객관성과 균형을 유지했어야 했습니다. 눈에 드러나는 편애는 가슴에만 묻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편애는 결국 불행의 씨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야곱은 베냐민을 보내지 못합니다.



절하다

5절과 6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 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여기서 반드시 눈에 들어와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절하다’입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 37장 9절에서 이미 등장했습니다.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런데 지금은 별이 몇 개입니까? 열 개입니다.
아직 베냐민이 없습니다. 꿈은 아직 덜 성취되었습니다.



억울함

요셉은 형들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감옥에 가둡니다. 18절부터 보겠습니다.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형들은 서로 히브리어로 대화합니다. 요셉이 알아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겠지요.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억울함을 당하면서, 형들은 자기들이 저질렀던 일을 처절하게 기억해 냅니다.

억울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십자가의 신비

성경은 우리를 계속 어디로 몰아갑니까? 십자가로 몰아갑니다.

십자가의 신비란, 십자가가 신비롭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신비롭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건은 결국 우리를 십자가 앞으로 밀어붙이고, 우리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그리스도가 왜 이렇게까지 나를 위해 죽으셔야 했는가, 그 앞에서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42장을 읽다 보면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가나안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이것은 로마서의 대속 원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어 모두가 타락했고, 한 사람이 죽음으로 모두가 살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리스도의 예표이고, 야곱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베냐민

36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이 고백은 너무도 인간적입니다. 야곱은 여전히 자기 중심적으로 인생을 해석합니다. 모든 우주가 자기 위주로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42장에서는 놓지 못합니다.

그리고 43장에 들어가면 하나님은 기근을 더 강화하십니다.
베냐민을 놓을 때까지.

우리에게도 그런 베냐민이 있습니다.



달라진 형들

유다가 나섭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형들은 달라졌습니다.
지난 20년의 형벌 속에서, 이제는 책임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려놓음

마지막으로 14절입니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드디어 야곱이 내려놓습니다.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이 결정적인 자리에는 야곱의 포기, 내려놓음이 있었습니다.



맺음말

놓아야 만납니다.
내려놓아야 회복이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요셉을 대변하는 그리스도를 만났듯,
각자의 삶 속에서 붙들고 있는 베냐민을 내려놓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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