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42)-마하나임의 하나님 (창세기 32:1-12)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창세기 32장 첫머리에서 야곱은 드디어 라반과 조약을 맺고 자유의 몸이 되어 귀향길에 오릅니다. 오랜 세월의 종살이와도 같았던 시간을 지나, 이제 본격적으로 아버지의 집을 향해 돌아가는 길에 들어섭니다. 그러나 인생은 늘 그렇듯이, 한 문제가 끝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살이와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한 고비를 넘기면 또 다른 고비가 나타나고, 더 큰 문제를 넘긴 것 같으면 또 다른 문제가 엎어져 옵니다. 야곱의 인생 역시 그러합니다. 그래서 야곱의 삶은 성도들의 나그네 인생과 견주어 생각할 요소가 참으로 많습니다.
마하네와 마하나임
야곱이 길을 가는 중에 놀라운 장면을 맞이합니다.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창세기 32장 1절)
여기서 ‘하나님의 사자’라는 표현의 히브리어는 마하네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쌍수 용법으로 사용됩니다. 쌍수란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본 하나님의 사자들은 한 무리가 아니라, 마치 군대의 진영처럼 똑같은 병력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부릅니다. 마하네의 쌍수형 표현으로, 문자 그대로는 ‘하나님의 군대’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사자를 보았는데 동일한 무리가 둘로 서 있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함께 하심이 은혜
히브리어의 언어 구조를 보면, 마하네와 마하나임은 같은 어근을 공유합니다. 앞과 뒤의 글자를 제거하면 가운데에 정확히 일치하는 단어 하나가 남습니다. 그 단어가 바로 ‘해’입니다. 히브리어에서 ‘해’는 은혜라는 뜻을 가집니다.
히브리인들의 사고에서 쌍수는 단순히 숫자 ‘둘’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쌍수는 결합과 연합, 하나 됨을 상징합니다. 또한 증거의 수이기도 합니다. 둘은 일치와 연합, 결속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야곱에게 무엇을 보여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나는 너와 하나였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군대의 대장되신 하나님
이 본문 전체를 보면 ‘두 떼’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야곱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창세기 32장 10절)
야곱의 재물도 두 떼로 나뉘어 있고, 그의 삶 전체가 ‘둘’이라는 구조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이 두 떼는 야곱의 분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 속에 있는 연합을 암시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을 종종 하나님의 군대로 묘사합니다.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출애굽기 12장 17절)
또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 앞에서 만난 존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여호수아 5장 14절)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군대는 천상적인 존재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자신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필요할 때만 도움을 주는 분이 아니라, 직접 통치하시고 이끄시는 대장이십니다.
벧엘의 약속
야곱이 본 하나님의 사자들은 처음이 아닙니다. 20년 전 벧엘에서도 그는 같은 존재를 보았습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창세기 28장 12절)
그때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창세기 28장 15절)
지금 야곱은 바로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길 위에 서 있습니다. 마하나임은 20년 만에 새롭게 등장한 사건이 아니라, 20년 동안 한 번도 끊어지지 않았던 하나님의 동행에 대한 확인입니다.
이 약속은 예수님의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 28장 20절)
보았으나 붙들지 못한 신앙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야곱은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도 그저 흘깃 보고 지나갑니다. 반응이 없습니다. 붙들지도, 매달리지도 않습니다.
이 모습은 야곱의 신앙 수준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보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머뭇거립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 성장 과정과도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야곱이 두려워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뺏길 것이 있고, 내려놓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하나임을 통해 “너는 혼자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야곱은 여전히 자기 힘으로 인생을 책임지려 합니다.
에서의 분노의 해결
야곱의 귀향은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으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창세기 31장 3절)
그러나 그 길목에 에서의 분노라는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야곱의 궁극적인 목적은 가나안 입국, 곧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문제처럼 보이는 에서의 분노를 해결하지 않으면, 그 귀향은 결코 완성될 수 없습니다.
사단은 언제나 디테일 속에 발톱을 숨깁니다. 큰 문제보다 작은 문제로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가장 힘든 문제는 바로 에서였습니다.
에서에게 보내진 세 가지
야곱은 에서를 향해 사자를 보냅니다.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창세기 32장 3절)
그가 전한 메시지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형 때문에 도망간 것이 아니라는 설명입니다.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창세기 32장 4절)
둘째, 재물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한 말입니다.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창세기 32장 5절)
셋째, 가장 중요한 고백입니다.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창세기 32장 5절)
이 마지막 말이 바로 야곱의 진심이었습니다. 사실 이 고백은 하나님께 먼저 드려졌어야 할 말이었습니다.
400명
사자들이 돌아와 전한 소식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창세기 32장 6절)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모든 것을 두 떼로 나눕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두 떼로 나누고”
(창세기 32장 7절)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창세기 32장 11절)
이 기도에는 절박함이 담겨 있지만, 여전히 전적인 맡김은 없습니다. 야곱은 아직도 인생의 무게추를 자기 쪽에 붙들고 있습니다.
홀로 남는 밤
야곱은 결국 모든 것을 얍복 강 건너로 보냅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창세기 32장 24절)
이 장면은 매우 중요합니다. 처자식도, 재물도, 소유도 모두 건넸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야곱 자신뿐입니다. 인생은 결국 이런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자기 문제는 결국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서서 감당해야 합니다.
강을 건넌다는 것은 히브리 사고에서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이제 야곱은 되돌아갈 수도,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그는 마침내 홀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결정적인 만남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과의 씨름
야곱의 인생은 마침내 홀로 남는 밤으로 이끌립니다. 그 밤에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창세기 32장 24절)
이 장면은 흔히 ‘야곱의 기도’라고 불리지만, 엄밀히 말하면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께 다가가는 행위이지만, 이 본문에서는 야곱이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먼저 야곱에게 싸움을 걸어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야곱의 인생에 개입하신 사건입니다.
야곱이 완전히 고립된 순간, 더 이상 의지할 것이 하나도 남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마침내 그를 정면으로 마주하십니다.
이기지 못함을 보시고
씨름은 밤새도록 계속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매우 중요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창세기 32장 25절)
여기서 ‘이기다’라는 표현을 승패의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기지 못하셨다는 말은, 야곱의 고집과 의지, 끝까지 붙드는 집착을 꺾을 수 없음을 보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마지막 하나를 여전히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홀로 남고, 밤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자기 방식, 자기 의지, 자기 생존 본능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육체의 심판
하나님은 결국 결정적인 행동을 하십니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창세기 32장 25절)
이때부터 야곱은 절게 됩니다. 그는 남은 인생을 절뚝거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 절음은 단순한 신체적 장애가 아닙니다. 이는 야곱의 평생에 남은 은혜의 흔적이며, 동시에 자기 의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표식입니다.
히브리적 이해에서 허벅지 관절은 생식기 근처를 의미합니다. 이는 “너는 이제 육체적으로 죽었다”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체는 몸 그 자체가 아니라, 야곱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육체적 본성, 자기중심적 생존 방식, 계산과 움켜쥠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단번에 꺾으십니다.
붙드는 인생
그때 야곱이 말합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세기 32장 26절)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붙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출생 순간부터 형의 발뒤꿈치를 붙들고 나왔습니다. 평생을 움켜쥐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는 붙듭니다.
그러나 이 붙듦은 이전과 다릅니다. 이제는 자기 인생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드는 붙듦입니다. 심판 같은 고통을 당한 뒤, 떠나시려는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처음으로 참된 고백의 자리에 섭니다.
이는 우리식으로 말하면 “주님이 나의 구주이십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최초의 신앙 고백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제 이상한 질문이 이어집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창세기 32장 27절)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야곱의 체질과 인생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이 질문은 야곱으로 하여금 자기 실체를 직면하게 하는 질문입니다.
“너는 누구냐?”
“너는 지금까지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느냐?”
야곱은 대답합니다.
“야곱이니이다”
‘야곱(야코프)’이라는 이름은 “움켜쥐는 자”, “발뒤꿈치를 잡고 사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자신의 인생과 정체성을 스스로 고백하는 말입니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나는 붙들고, 속이고, 계산하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이 고백은 홀로 남은 밤에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 자리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이스라엘
그때 하나님은 이름을 바꾸십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창세기 32장 28절)
흔히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라고 번역되지만, 이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본질적 의미는 이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이 너의 인생을 통치하신다.”
이 이름은 완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선언입니다.
“앞으로 너를 이스라엘로 만들어 가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 안에는 여전히 야곱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여전히 야곱으로 불리웠지만, 창세기의 마지막에 이르러, 야곱은 마침내 이스라엘로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리고 한 개인의 이름은 한 민족의 이름이 됩니다. 하나님과 씨름한 한 밤이, 한 역사의 출발점이 됩니다.
맺음말
야곱의 얍복강가는 패배의 자리가 아니라 항복의 자리입니다.
붙들던 손이 부서지고, 절게 된 다리로 걷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러한 밤이 필요합니다.
홀로 남겨지는 밤,
하나님이 이름을 묻는 밤,
그리고 새 이름을 받는 밤입니다.
그 밤을 통과한 인생만이, 진정한 이스라엘로 걸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밤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밤을 지나야 참된 이름을 얻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마하나임과 얍복 강가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붙드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