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15)-기억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8:1-12)


창세기강해(15)-기억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8:1-12)

이 내용은 송태근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
15번째, 기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 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방주에서 나오는 날

오늘 우리는 노아의 가족이 약 1년 만에 방주 밖으로 나오는 장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 장면을 단순히 “홍수가 끝났다”는 사건으로만 읽기에는, 그 안에 담긴 무게가 너무 큽니다.

방주 안에서 보낸 1년 동안,
노아가 살던 마을은 물에 잠겼고,
이웃과 익숙했던 세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죽었고,
땅 아래 깊음의 샘이 터지고 하늘의 창이 열리며,
억수 같은 비가 아니라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물이 쏟아졌습니다.

동서남북을 바라보아도 끝없는 망망대해,
엔진도 없고 키도 없고 돛도 없는,
그저 나무 상자 같은 방주 하나가 둥둥 떠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항해였습니다.

노아는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이 물은 정말 그치긴 하는 걸까?”
“이 배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불안과 두려움, 외로움과 긴 밤이 반복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셨더라”

그 긴 시간 끝에,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창세기 8:1)

여기서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기억하사’, 히브리어로 자카르입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 8장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언어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억했다”는 말을
어떤 행동이나 공로를 떠올렸다는 의미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기억했느냐가 아니라, 누가 기억했느냐입니다.

주어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셨습니다.



조건 없는 기억하심

이 자카르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다른 본문을 함께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에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창세기 19:29)

롯이 구원받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롯에게는 구원받을 만한 조건이나 근거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롯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생각하사” 역시 자카르입니다.

이 말은 곧,
구원은 대상자의 자격이나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언약을 통해 오실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같은 구조가 또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창세기 30:22)

라헬에게도 이유는 없습니다.
조건도, 자격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기억하셨을 뿐입니다.

이것이 자카르입니다.
기억될 만해서 기억하신 것이 아니라,
기억하셨기 때문에 은혜가 시작되는 것
입니다.



심판의 물을 거두심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신 후,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 비가 그치매”
(창세기 8:1–2)

심판의 상징이었던 이 점점 줄어듭니다.
그런데 이 물은 한순간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차츰차츰 줄어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원인입니다.
물이 줄어든 이유는 태양이 아닙니다.
성경은 의도적으로 태양을 등장시키지 않습니다.

대신 등장하는 것이 바람입니다.
이 바람은 히브리어로 루아흐, 곧 하나님의 영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도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셨고,
그 결과 물이 물로 모이고 땅이 드러났습니다.

같은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불자, 심판의 물이 물러갑니다.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
(창세기 8:14)

여기서 “말랐더라”는
물기가 전혀 없는 완전한 마름을 뜻합니다.
심판은 완전히 거두어졌습니다.



까마귀와 비둘기

노아는 물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두 마리의 새를 날립니다.
먼저 까마귀, 그다음 비둘기입니다.

까마귀와 비둘기에 대해 우리는 종종 상징을 덧붙이지만,
본문의 의도는 훨씬 단순하고 실제적입니다.

까마귀는 고지대에서 서식하며 먹이를 찾는 새이고,
비둘기는 저지대와 계곡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새입니다.

노아의 목적은 단 하나였습니다.
물이 얼마나 줄었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까마귀를 먼저 보내는 것이 합리적이고,
비둘기를 나중에 보내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
(창세기 8:14)

이 말은 곧,
이제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방주에서 나오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마침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창세기 8:16)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창세기 8:19)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창세기 7:1)

들어가라고 하신 분도 하나님,
나오라고 하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심판의 시작과 끝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었습니다.



제단에서 완성되는 홍수 사건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제사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창세기 8:20)

방주에 함께 들어왔던 정결한 짐승은
이제 제단 위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왜 부정한 것들을 살려 두셨을까요?
그 부정한 것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정결한 짐승의 죽음으로
부정한 자가 살아납니다.

이 제사는 장차 오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합니다.



“다시는 이 방식으로 멸하지 않겠다”

하나님은 제사를 받으신 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여호와께서 마음속으로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8:21)

사람이 악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이런 심판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
아들을 내어주는 구속의 길을 선택하십니다.



자카르에서 시작된 구원

이 모든 구원의 출발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카르, 기억하심입니다.

그 기억하심 때문에 언약이 세워지고,
언약 때문에 어린양이 죽고,
그 죽음으로 부정한 우리가 살아납니다.

그래서 노아라는 이름은
‘안식’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해 주시면 됩니다.
문제마다, 사연마다, 인생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자카르가 임하면 됩니다.

이 시대가 방주처럼 흔들릴지라도,
하나님이 이 땅을, 교회를,
그리고 우리의 삶을 다시 기억하신다면
회복은 다시 시작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기억하심 가운데 살아가는
참된 안식을 누리는 삶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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