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03)-왕권! (창세기 1:24~31)


창세기강해 03-왕권! (창세기 1:24~31)

이 글은 송태근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
"왕권"이란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 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질서의 원리

창세기의 창조 기사를 자세히 보면, 하나님은 여섯 날의 창조를 두 개의 3일 구조로 나누어 진행하셨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앞의 3일(1-3일)은 공간과 틀을 만드는 과정,
뒤의 3일(4-6일)은 그 틀 안을 내용물로 채우는 과정입니다.

  • 1일 ↔ 4일: 빛과 어둠의 질서를 만들고, 그 위에 해·달·별을 두심
  • 2일 ↔ 5일: 하늘과 바다를 나누시고, 그 공간에 새와 물고기들을 채우심
  • 3일 ↔ 6일: 땅과 식물을 내시고, 그 땅 위에 짐승과 인간을 창조하심

이 구조는 하나님이 정돈된 질서 속에서 세상을 세우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중에서도 오늘은 여섯째 날, 즉 인간 창조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려 합니다.



‘종류대로’ 창조하신 하나님

창세기 1장 24절에 보면, 하나님은 땅의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라고 명하십니다.
짐승, 가축, 기는 것들 모두 예외 없이 종류에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 방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다른 모든 피조물은 종류대로 지으셨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인간의 존재가 다른 피조물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또한 “우리”라는 표현은 삼위 하나님,
성부–성자–성령이 함께 하신 창조임을 나타냅니다.



‘형상’과 ‘모양’의 의미

성경은 인간 창조를 묘사하면서 형상(제렘)모양(데모투)이라는 두 단어를 분명히 구분해 사용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같은 의미라고 보기도 하지만, 성경 기자가 굳이 다른 단어를 쓴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① ‘형상(제렘)’—새기다, 기록하다

형상의 문자적 의미는 “새기다”입니다.

이 단어는 긍정적으로도 쓰이지만, 우상을 만들 때처럼 무언가의 모습을 새긴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학교 동상(언더우드 동상 등)을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인물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동상은 그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형상은 무엇인가를 기억하게 만들고, 유추하게 만드는 기능을 가집니다.

바로 이 원리가 인간 창조에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떠올리고, 하나님을 유추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② ‘모양(데모투)’—틀이 아니라 ‘특성을 닮도록’

모양이라는 단어는 흔히 ‘틀’의 느낌을 주지만, 성경적 의미는 다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양은 DNA처럼 특성을 닮다, 즉 그 본질을 담는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특징을 자연스럽게 닮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성품을 닮도록 지음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신약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형상’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포합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예수님을 보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4장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예수님이 곧 아버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삶 속에 아버지의 형상이 반영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5절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즉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부르심

로마서 8장 29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죄로 인해 그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망가진 형상을 회복하셨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삶으로 다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맏아들’이라는 표현도 이와 관련됩니다.
맏아들이라는 말은 형제들이 있다는 의미이며,
그 형제는 바로 구원받은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분을 따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형상

고린도후서 4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시기에,
그리스도의 광채가 우리 안에 비칠 때 비로소 우리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됩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렇게 이어집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 그리스도가 생각나는가?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이 유추되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보여 주도록 지음 받았고,
그 형상을 살아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 앞에서 마음이 뜨끔해지는 이유는,
아직 회복해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창세기 1장 27절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곧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짧은 구절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인간의 동등한 가치와 존엄을 선언하는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오랜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남녀 간의 불평등이 깊게 남아 있습니다. 여성 대통령이 등장했다고 해서 여권이 완전히 신장되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남성과 여성은 창조의 가치 면에서 완전히 동등합니다.
물론 역할은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가치는 동일합니다.

이 주제는 창세기 2장에서 더 구체적으로 다루어지므로, 오늘은 계속해서 본문의 흐름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복’을 주시기 위해 창조하심

창세기 1장 28절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의 첫 문장은 단순합니다.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이 ‘복’이란 무엇일까요?


히브리어 ‘바라크’의 의미: 무릎 꿇어 경배하는 것

히브리어로 복(Barak)의 기본 의미는 ‘무릎 꿇다, 경배하다, 찬양하다’입니다.
성경의 복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물질적 부요와 다릅니다.

성경은 복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 무릎 꿇어 순종하고, 그분을 예배하며, 그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복의 시작입니다.

기독교는 물질 자체를 악한 것으로 보지도 않지만, 물질적 부를 복의 본질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성경의 복은 관계적 복, 생명의 복입니다.



창조 질서 안에서의 사명

하나님이 복을 주신 뒤 그 복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

여기 등장하는 ‘정복’, ‘번성’, ‘충만’, ‘다스림’은 모두 왕에게 주어지는 권한입니다.
즉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역사 속 서구 신학은 이 ‘정복’이라는 단어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방식으로 오해했던 때가 있었지만, 성경이 말하는 정복은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성경적 정복은 ‘생명의 확장’이다

하나님이 주신 복의 명령은 생명을 확대하는 사명을 의미합니다.

  • 억압이 아니라 회복
  • 훼손이 아니라 살림
  • 착취가 아니라 섬김

예수님이 “인자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섬기러 오셨다”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섬김을 통해 생명을 세우는 왕권을 의미합니다.

기독교가 한 지역에 들어가면 나타나는 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땅에는 회복, 질서, 생명의 존중이 나타나야 합니다.



복의 깊은 의미

복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후손을 통한 생명의 확장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너는 복이 될지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단순히 자녀를 주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후손을 통해 오실 그리스도, 곧 생명을 회복하실 분을 예언하는 언약이었습니다.



창조 질서의 회복

하나님이 창조하기 전 땅은 세 가지 상태였습니다.

  • 혼돈
  • 공허
  • 흑암

하나님의 창조는 이 세 가지를 역전하는 과정이었습니다.

  • 혼돈 → 질서
  • 공허 → 충만함
  • 흑암 → 빛과 생명

그리스도의 생명이 들어오면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썩은 냄새가 사라지고, 질서가 회복되며, 어둠이 빛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왕권과 그 회복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은 원래 부여받은 왕권을 상실했습니다.
창세기 전체의 흐름은 결국 잃어버린 왕권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지막 책인 계시록에서 왕권의 회복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계시록 22장—생명과 왕 노릇의 회복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여기에서 성도들이 회복된 왕권을 누리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2장도 말합니다.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

왕 같은 제사장의 통치는 억압이 아니라 희생,
지배가 아니라 섬김,
무너뜨림이 아니라 회복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결론처럼 말합니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사망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으로 다스리는 왕이 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덕으로 세상을 회복시키는 사명

세상은 오늘도 사망이 왕 노릇 하는 구조 속에 있습니다.
혼돈, 흑암, 공허, 폭력, 분쟁, 상처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은 성도는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왕으로 산다는 것은

  •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으로 세상을 밝히고, 공허를 채우고, 혼돈을 질서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로 이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가 머무르는 자리마다
죽었던 것이 살아나고,
어둠이 걷히고,
생명이 흘러가며,
회복이 일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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