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26)-아브라함과 나그네 대접(창세기 18:1-18)


창세기강해(26)-아브라함과 나그네 대접(창세기 18:1-18)

이 글은 송태근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
26번째 아브라함과 나그네 대접

설교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오심

오늘 본문, 창세기 18장 1절부터 18절까지를 보면 매우 특별한 장면이 등장해요. 성경 전체를 통틀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실제로 현현하신 유일한 사건이 바로 이 장면이에요. 흔히 신인동형론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직접 찾아오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 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라” (창세기 18:1)

‘날이 뜨거울 때’라는 표현은 하루 중 가장 태양이 강렬한 정오 무렵을 가리켜요. 팔레스타인 지역은 낮과 밤의 기온 차가 극심해서, 이 시간대에는 사람이 이동하기조차 힘든 때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거예요.

그리고 그때 아브라함은 “장막 문에 앉아 있었다”고 기록됩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쉬고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고대 근동 문화에서 장막 문에 앉아 있다는 것은 공동체의 대표자, 책임자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공동체의 실질적인 대표였어요.



“내 주여”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사람 셋을 보고 즉시 달려 나가 그들을 맞이합니다.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창세기 18:2–3)

여기서 아브라함은 그들을 향해 “내 주여”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이들이 하나님인 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이 장면을 단편적으로 보면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성경은 언제나 입체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신약의 한 구절이 중요한 힌트를 줍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히브리서 13:1–2)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히 말합니다.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했다고요. 즉, 아브라함은 알고 대접한 것이 아니라 모르고 대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주여”라는 표현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고대 히브리 사회의 나그네 환대법 속에서 이해해야 해요. 당시 히브리 공동체에서 나그네를 대접하지 못하는 것은 공동체 전체의 수치였고, 명예가 걸린 문제였습니다. 율법은 나그네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었고, 이 환대는 신앙이자 전통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주여”라는 표현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신앙 고백이라기보다는, 존귀한 손님을 향한 공손한 호칭으로도 충분히 사용되던 표현이었어요.



뜻밖의 약속

아브라함은 이 세 사람을 정성껏 대접합니다. 그리고 그 대접 이후, 놀라운 약속이 주어집니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창세기 18:10)

여기서 눈여겨볼 표현이 하나 있어요.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이 말은 단순히 1년 후 다시 방문하겠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이것은 장차 아브라함의 몸을 통해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암시하는 표현이에요. 1년 후 이삭이 태어나고, 그 후손을 통해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게 됩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겨요.
나그네 대접과 아들의 약속은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을까?



나그네, 과부, 고아

성경에서 나그네, 과부, 고아는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레위기 율법에서도 이들은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분명히 규정돼 있어요. 왜일까요?

이들은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이 땅에서 기반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 자리가 바로 우리의 옛 자리였어요.
우리는 영적으로 나그네였고, 고아였고, 보호자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누구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상태였어요.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이웃의 모습으로, 육신을 입고 찾아오신 겁니다. 그래서 나그네 대접 뒤에 아들의 약속이 붙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에요. 구원은 오직 아브라함의 몸을 통해 태어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구원과 멸망

창세기 18장은 한 가지 이야기만 말하지 않아요. 이 장 안에는 두 개의 흐름이 동시에 진행됩니다.

하나는 사라에게 주어진 아들의 약속, 그리고 또 하나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창세기 18:17–20)

나머지 두 천사는 소돔으로 향합니다. 그 도성은 결국 멸망당합니다. 이유는 단 하나예요.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열 명은 최소 공동체 단위입니다. 즉, 소돔과 고모라는 공동체로서 이미 끝난 상태였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 사이에서 누가 중보자로 나섭니까?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 우리의 자리이자 부르심

아브라함은 특별해서 선택받은 사람이 아니에요. 믿음이 완벽해서도 아닙니다. 그는 실패했고, 불순종했고, 기다리지 못했던 사람이에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구원이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를 온 인류에게 보여주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받아 마땅한 우리의 옛 삶의 모습이고, 아브라함은 지금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중보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웃음에서 복음으로

사라는 약속을 듣고 웃습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창세기 18:12)

이 웃음은 믿음의 웃음이 아니라 불신의 웃음이었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창세기 18:14)

그리고 시간이 지나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창세기 21:6)

이것이 복음입니다.
듣는 자가 다 함께 웃게 되는 소식.

처음엔 조롱받고, 믿지 못해 웃음이 나왔지만, 하나님은 그 웃음을 구원의 기쁨으로 바꾸십니다.



시선이 바뀔 때 삶의 자리가 바뀐다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보았습니다.
롯은 자기 중심으로 보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 중심으로 보았습니다.

“내게로부터 눈을 들어 주를 보기 시작할 때”

이 고백처럼, 신앙은 시선의 문제입니다.
자기 중심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중보자의 자리, 아브라함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성도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계신지 함께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와 상관없는 이들의 아픔까지 품으려면, 수많은 경계선이 무너져야 합니다.

이것이 탈교회적 사고입니다.
교회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넘어 하나님의 마음으로 나아가는 신앙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를 다시 아브라함의 자리로 부르길 소망해요.
하나님의 시선을 따라, 중보자의 자리에서 이 시대를 품는 성도로 서게 되기를 축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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