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49) 요셉의 두가지 이야기 (창세기 39:1-23)

야곱의 톨레도트
요셉의 이야기는 흔히 한 개인의 성공 서사처럼 읽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를 깊이 들여다보면, 요셉의 이야기는 결코 요셉 개인의 인생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야곱의 족보, 다시 말해 야곱의 톨레도트 안에 놓여 있는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교묘했고, 수많은 꾀와 술수에 능했던 인물입니다. 그런 야곱이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 다듬어지고, 불순물이 뽑혀 나가며, 결국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재창조되는가를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요셉 이야기는 야곱 없이 존재할 수 없고, 더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요셉은 성경 안에서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거대한 야곱의 톨레도트 위에 요셉의 이야기를 얹으심으로, 한 죄인을 어떻게 구속사의 인물로 빚어 가시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이 관점으로 창세기를 읽지 않으면 해석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39장
창세기 39장은 반전도 있고, 분노도 일어나며, 서사적으로도 매우 강렬한 장입니다. 읽다 보면 누구라도 묻게 됩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이렇게 억울할 수가 있나?”
요셉은 형들의 분노로 인해 팔려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보디발의 집에 팔려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장을 읽는 우리의 눈을 거슬리게 만드는 문장이 하나 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라” (창세기 39:2)
팔려가고, 노예가 되고, 결국 감옥까지 가게 되는 이 인생이 과연 ‘형통’입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것이 정말 ‘함께하심’의 모습입니까?
형통
성경은 같은 단어처럼 보이는 ‘형통’을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단어를 정확히 구분해야 합니다.
시편 30편을 보겠습니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시편 30:4)
“그의 노여움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편 30:5)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시편 30:6)
여기서 ‘형통’이라는 단어는 창세기 39장에서 사용된 단어와 전혀 다릅니다. 시편에서 쓰인 이 단어는 샬바 שלוה, 즉 세상적으로 잘 나갈 때를 의미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온전히 경험하기 전, 세상적으로 형통할 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정도면 흔들릴 리가 없어.”
그러나 하나님이 한 번 후- 불어 버리시니, 그 형통은 안개처럼 사라졌습니다. 인간의 형통은 그렇습니다. 이것이 샬바 שלוה입니다.
형통, 찰라흐의 의미
다시 창세기 39장으로 돌아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창세기 39:2)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세기 39:3)
여기서 사용된 ‘형통’은 찰라흐(צָלַח)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기준은 환경이 아닙니다. 상황의 유리함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 자체가 형통의 기준입니다.
이 ‘찰라흐’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나를 통해 진행되고 완성되는 것.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형통입니다.
요셉의 꿈
요셉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꿈’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꿈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요셉의 꿈은 요셉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꿈은 요셉의 인간적인 자아를 하나씩 깨뜨리며,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서서히 드러납니다. 요셉은 인간적으로도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타국에 팔려가 주인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받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요셉의 성실함을 인간적 미덕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창세기 39:2)
성실함조차 은혜의 결과입니다. 맡겨진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확고한 인식, 이것이 믿음입니다. 인간의 의지로는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당할 수 없다
노아와 에녹은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인이 되었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은혜를 입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운 좋은 사람은 당할 수 있어도, 은혜 받은 사람은 당할 수 없습니다.
요셉은 아직 자기 인생에 진행 중인 하나님의 큰 그림을 알지 못합니다. 출애굽기에서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기억하사” (출애굽기 3장 참조)
고난의 이유는 눈물이 아니라 언약입니다. 우리는 조각만 보고 있지만, 어느 날 그것이 완성된 그림으로 보일 때가 옵니다. 그 장면이 바로 창세기 45장입니다.
두 가지 이상한 특징
요셉의 인생에는 두 가지 이상한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요셉의 고난은 모두 남 때문에 당한 고난입니다.
형들 때문에 팔렸고,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감옥에 갔습니다.
이 모습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삶을 예표합니다.
둘째, 요셉 때문에 남들만 잘 삽니다.
요셉은 축적되는 것이 없습니다. 대신 다른 사람들이 먹고 삽니다.
이것 역시 자기 몸을 찢어 생명의 떡이 되신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함께 먹고 사는 삶
그리스도인의 삶은 요셉의 삶과 닮아야 합니다.
남을 먹여 살리는 책임, 함께 먹고 사는 정신입니다.
시편은 말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시편 23편 참조)
교회는 그 시대의 눈물이 되어야 합니다.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진짜 개혁은 구조가 아니라 예수만 남겨지는 개혁입니다.
피해야 하는 죄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창세기 39:7)
요셉은 날마다 반복되는 유혹 앞에서 세 가지 이유로 승리합니다.
첫째,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입니다.
둘째, 정욕의 죄는 맞서 싸우는 죄가 아니라 피하는 죄입니다.
셋째,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시편 119:9)
함께하시는 하나님
결국 요셉은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시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창세기 39:21)
요셉 때문에 간수장이 은혜를 받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게 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복을 누리게 되는 삶, 이것이 요셉의 삶이며 그리스도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