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02) 혼돈, 공허, 흑암 (창세기 1:2~5)


창세기 강해(02) 혼돈, 공허, 흑암 (창세기 1:2~5)

이 글은 송태근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
"혼돈, 공허, 흑암"
이란 제목으로 전하신
 설교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목사님의 영상 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이는 첫째 날이니라


애굽에서 광야로: 창세기가 기록된 배경

창세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언제, 왜 기록되었는가?”라는 질문을 떠올릴 필요가 있어요. 창세기를 포함한 모세오경은 모세가 광야에서 기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무려 400년 동안 애굽의 문명, 우상숭배, 물질 중심 문화 속에 묻혀 살았어요. 그들의 전통적인 야훼 신앙은 희미해지는 정도를 넘어서 거의 잊혀져 가는 상태였죠.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해방되어 광야로 나왔을 때,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척박한 사막뿐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풍요로운 애굽과 광야를 비교할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 관점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어요.



모세오경의 목적: 하나님이 누구신가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 즉 모세오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둘째, 왜 인간을 구원하셔야 했는가?
셋째, 인간의 현실은 얼마나 절망적인가?
넷째, 왜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약속일 수밖에 없는가?

모세오경은 단순한 고대 문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약속과 구원의 근본을 다시 세워주는 신앙의 기초서였던 거죠.



창세기 1장 1절이 담고 있는 결론

지난 시간에도 다루었지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짧은 한 문장은 성경 전체의 결론을 압축하고 있어요. 히브리어 원문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속에는 단지 창조의 사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시작과 완성의 주체가 오직 하나님이심을 이미 선언하고 있습니다.

특히 ‘레시트(첫 열매)’라는 개념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와 연결되며,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미리 보여주는 중요한 신학적 중심축이기도 합니다.



창세기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우리는 때때로 창세기를 과학, 물리학, 철학적 논리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하곤 해요. 물론 그런 연구도 의미가 있지만, 창세기의 핵심 관점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이 누구이며, 인간에게 왜 구원이 필요한가를 보여주기 위해 기록된 책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접근할 때에는 “이 말씀이 하나님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 “왜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인가?”를 중심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땅’의 상징

오늘 본문은 “땅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성경에서 ‘땅’이나 ‘밭’은 단순한 자연 환경을 의미할 때보다 사람, 사람의 마음, 사람의 존재 상태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씨 뿌리는 자’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면, 열매를 결정하는 핵심은 씨가 아니라 밭의 상태, 즉 마음의 상태였지요. 성경은 ‘땅’을 통해 인간의 영적 상태를 묘사하는 데 자주 사용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을 흙에서 취해 만드셨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의 존재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언어가 ‘땅’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창세기에서 땅이 창조의 중심으로 다뤄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책은 우주 기원이나 과학적 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구원의 필요성,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기록된 책이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땅의 모습: 혼돈·공허·흑암

성경은 창조 이전 ‘땅’의 모습을 세 단어로 묘사합니다.

  • 혼돈(형태가 갖춰지기 전의 상태)
  • 공허(텅 비어 채워져야 하는 상태)
  • 흑암(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어둠)

여기서 말하는 혼돈은 단순히 무질서가 아니라, 아직 형태가 만들어지기 전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형태가 없으면 당연히 비어 있지만, 그 ‘비어 있음’은 곧 채워질 준비가 되어 있는 공간을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는 표현에서 ‘깊음’은 계시록 20장의 “무저갱(끝 모를 깊이)”과 같은 단어로, 장소보다 상태를 말합니다. 즉,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깊고 짙은 어둠을 의미합니다.

이 세 단어는 단순한 물리적 묘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영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예레미야가 본 ‘혼돈·공허·흑암’

예레미야 4장에서 하나님은 타락한 이스라엘 공동체를 묘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더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자 땅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초목이 사라지며 새들도 깃들 곳을 잃어버립니다. 이는 창세기 1장의 원초적 땅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즉, 성경은 반복해서 하나님과 멀어진 인간의 상태를 ‘혼돈·공허·흑암’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위에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영

창세기 1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여기서 ‘운행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알을 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가 알을 품을 때처럼, 움직이지 않은 채 따뜻하게 보호하고 생명을 잉태시키는 모습이지요.

성령께서는 혼돈·공허·흑암 위에 계시며
새 생명을 준비하시고,
질서를 세우며,
창조를 시작하시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인간의 심령 위에도 동일하게 임하셔서, 재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시는 분입니다.



독수리의 양육처럼 우리를 품으시는 하나님

신명기 32장은 이 장면을 더욱 생생하게 설명합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새끼를 위하여 날개를 펴서 받는 것 같이…”

독수리는 새끼를 훈련시키기 위해 보금자리를 흔들어 떨어뜨리지만, 땅에 부딪히기 직전 날아와 넓은 날개로 받아냅니다. 그리고 다시 떨어뜨리고, 또 받습니다. 이 반복 속에서 새끼는 날아오르는 법을 배우고 결국 하늘을 나는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다루신 방식이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품고, 보호하고, 때로는 흔들고, 다시 일으키시는 사랑의 과정.



창조의 핵심 동력은 ‘사랑’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숨겨져 있습니다.
창조의 첫 장면부터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창조의 중심 가치였던 것이죠.

  • 하나님은 심심해서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 불쌍해서 구원하신 것도 아닙니다.
  • 사랑하셨기 때문에 창조하셨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구원하셨습니다.

로마서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확증되었느니라.”

십자가는 하나님의 감정이 아니라 의지적 사랑의 결론이었습니다.



우리의 존재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

하나님의 사랑이 창조와 구원의 근거라면, 하나님이 사랑하신 인간 존재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본질적으로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여전히 낮은 자존감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자존감의 근거는
능력, 재능, 성취가 아니라
창조와 구원의 근거 자체가 ‘사랑’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창세기는 곧 복음이다

창세기 1장은 단순한 창조 기록이 아닙니다.
혼돈·공허·흑암 속에 있는 인간의 상태,
그 위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
새 생명을 품으시는 성령,
그리고 사랑으로 움직이시는 창조의 하나님.

이 모든 장면은 장차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구원의 이야기를 미리 보여줍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라,
복음의 뿌리이며,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만드신 것, ‘빛’

창세기 1장에 따르면 하나님이 창조 가운데 가장 먼저 만드신 것은 입니다. 그리고 그 빛을 보시며 “좋았더라”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 ‘토브’는 단순한 ‘적당함’이 아니라 정확하고 합당하며 아름답다는 의미를 담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최고가 되라고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우리 각자가 하나님이 설계하신 자리와 역할 안에서 가장 적절하고 아름답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토브’의 개념입니다.

신약에서도 이 개념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토브)을 이룬다”는 로마서 말씀으로 이어지죠. 즉, 하나님은 우리의 삶 전체를 그분의 아름다움으로 재구성해 가시는 분입니다.



첫째 날의 빛, 그 정체는 무엇인가

설교자들이 가장 많이 고민하는 본문 중 하나가 바로 이 “빛의 정체”입니다. 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요.


(1) 첫째 날의 빛은 ‘태양 이전의 어떤 에너지’라는 견해

일부 학자들은 태양이 넷째 날에 등장하기 때문에 첫째 날의 빛을 태양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대신 하나님의 전능으로 인해 태양 없이도 빛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죠.

그러나 이 해석에는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첫째 날에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그 빛을 “낮”,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습니다. 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태양이 없다면 낮·밤·저녁·아침의 개념을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2) 첫째 날의 빛을 ‘태양’으로 보는 견해

또 다른 해석은 첫째 날에 이미 태양이 창조되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구약학자 김종호 박사 역시 이 입장을 지지합니다.
그렇다면 넷째 날에 등장한 광명체는 무엇일까요?

김 박사는 첫째 날 태양이 만들어졌고, 넷째 날에는 그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기능과 질서를 하나님이 부여하신 날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 첫째 날: 태양 창조
  • 넷째 날: 태양·달·별들의 기능(계절, 절기, 해, 시간의 질서) 부여

이렇게 되면 성경 전체의 흐름과 모순 없이 자연스럽게 해석이 됩니다.

설교자 역시 이 두 번째 해석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빛의 본질’, 즉 그리스도

첫째 날의 빛이 태양이든 에너지이든, 성경이 더 강조하는 핵심은 빛의 근원이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즉, 성경은 모든 ‘빛’이라는 존재를 그리스도로 설명합니다.

  • 그리스도가 비추는 곳에 어둠이 물러가며
  • 혼돈이 질서를 얻고
  • 공허가 채워지며
  • 흑암이 분명한 방향과 의미를 얻게 됩니다.

선교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두운 곳에 빛이 비치라”는 창조의 명령은 지금도 그리스도를 통해 계속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의 빛은 무엇인가

요한계시록 21장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해와 달의 빛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 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는 결국 ‘빛’을 그리스도로 연결하고, 마지막 날에 그 빛이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을 증언합니다.



창세기 속에 감춰진 복음

요약하자면 우리는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1) 인간의 본래 상태는 ‘혼돈·공허·흑암’이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창세기 1:2의 그 그림과 같습니다.


2) 그 위에 성령이 운행하셨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도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습니다.


3) 그 사랑은 ‘빛 되신 그리스도’로 나타난다
그 빛이 우리의 어둠을 몰아내고, 공허를 채우며,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운행하심과
빛 되신 그리스도의 임재가
여러분의 모든 흑암과 혼돈을 밝히 비추고,
공허한 인생을 새롭게 채우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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