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05)-에덴의 창설 (창세기 2:8~14)


창세기 강해(05)-에덴의 창설 (창세기 2:8~14)

이 글은 송태근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
5번째,
 
에덴의 창설이라는 제목으로
전하신 설교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 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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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창조 이야기

창세기에는 두 개의 창조 기사가 등장해요.
1장 1절부터 2장 3절까지는 첫 번째 창조 기사, 그리고 2장 4절부터 다시 다른 모습의 창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두 기사 형태가 다르다는 이유로 편집설을 제시하기도 해요. 그러나 이것은 서로 충돌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목적이 다른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두 방식으로 서술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해요.

예를 들어, 여행기를 말하다가 그 여행 중 겪은 어떤 사건을 강조하기 위해 다른 이야기를 덧붙이는 경우가 있죠. 설명의 목적이 다르면 이야기 방식도 달라지는 것처럼, 성경의 두 창조 기사는 전체 창조와 인간 중심 창조라는 두 목적에 따라 표현이 달라진 것뿐이에요.



두 번째 창조 기사의 목적

2장 4절에 보면 “하늘과 땅”이라는 순서로 시작했다가 뒤에서는 “땅과 하늘”로 순서가 바뀌어요. 이 순서의 변화는 지금부터 서술될 내용의 초점이 땅과 인간에게 맞춰진다는 의도를 담고 있어요.

인간은 흙, 더 정확히 ‘티끌’에서 만들어졌죠. 화장 후 남는 한 줌의 재처럼 인간의 본질은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줘요.



호칭 변화의 의미

1장에서는 계속 "하나님"으로 표현되지만 2장부터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바뀌어요. 단순한 호칭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 계획, 언약적 행동이 시작될 때 등장하는 표현이에요.
‘여호와’는 이름이 아니라 “스스로 있는 자”—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설명하는 표현이죠.

즉,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계획을 가동하고, 그 안에 자신의 뜻과 의지를 담아 일을 진행하실 때 사용되는 호칭이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경작되지 않은 땅의 의미

2장 5–6절은 아직 비가 내리지 않고 채소나 초목도 없는 땅을 묘사해요. 그러나 이 황량한 모습은 완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간의 손길을 기다리는 상태를 보여주는 장면이에요.

하나님은 인간을 이 땅에 두고, 계획하신 일을 함께 이루도록 부르셨습니다. 인간은 창조 세계 속에서 하나님과 협력하는 존재였어요.



에덴은 하나님의 ‘장막’

2장 8절에서 “동산을 창설하시고”라고 할 때 ‘창설하다’의 의미는 ‘장막을 치다’예요. 에덴은 단순한 정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거니시는 성소의 모형이었어요.

3장 8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셨다”는 표현도, 하나님이 에덴을 자신의 집처럼 다스리고 통치하셨다는 뜻입니다.



제사장으로 임명된 사람

“두셨다”는 말은 단순히 무엇을 ‘놓아두다’가 아니라 임명하다, 고정시키다라는 의미예요.
아담은 에덴이라는 성소 안에서 제사장적 역할을 맡았고, 그 기능은

  • 하나님을 섬기고
  • 성소의 거룩과 질서를 지키는 것
    이었어요.

아담은 왕이자 제사장, 관리자로서 에덴을 돌보도록 임명받았지만, 결국 이 사명을 선악과 사건으로 인해 잃어버리게 됩니다.



관심의 초점

사람들이 묻는 가장 흔한 질문은 “왜 하나님은 그런 나무를 만들어 인간을 곤경에 빠지게 하셨는가?”예요.
하지만 선악과의 핵심은 선악을 구분하는 기능이 아니라, 최종적 권위의 문제입니다.

뱀의 유혹은 “너희가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는 말이었어요.
문제는 ‘하나님처럼 되려는 시도’,
즉 창조주를 넘어서는 교만이었죠.



선악을 ‘판단하는 기능’이 아닌 ‘최종 권위’

성경에서 “선악을 알게 된다”는 표현은 단순한 도덕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치를 스스로 차지하려는 태도를 의미해요.
라반의 말처럼,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다”는 표현은, 최종적 판단권이 인간에게 있지 않다는 의미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에 걸려 넘어졌고, 그 결과 에덴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성막-성전-그리스도'로 이어지는 그림

에덴은 최초의 성소였고, 이후 성막과 성전으로 이어지며, 마지막엔 그리스도께서 참 성전으로 오셨어요.

‘톨레도트(내력)’라는 단어가 창세기 전체를 관통하는데, 이는 ‘생명을 낳는 계보’라는 뜻이에요. 모든 내력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라는 후손을 향해 흐르고 있었어요.

요한계시록 22장의 생명수 강과 생명나무의 회복은 에덴의 완전한 회복을 보여주는 장면이에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흘러나온 구속의 생명이 만국을 치유하고, 마침내 인류는 다시 왕노릇 하는 존재로 회복됩니다.



에덴을 잃어버린 자리

인류는 에덴의 상실 이후 끊임없이 갈증을 느껴요.
"여기에 만족이 있을까?"
"저기에 행복이 있을까?"
"이 길이 옳은 길일까?"

그러나 그 모든 갈증은 에덴의 상실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해결은 하나님을 최종적 권위로 삼는 삶 속에서만 이루어져요.


선악과 사건은 단순한 금지 명령 위반이 아니라,
“누가 최종적 왕이 될 것인가?”
라는 문제였어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순종할 때 비로소 인간은 온전함을 누리고, 그 안에서 회복과 평안, 그리고 풍성한 삶이 주어져요.
오늘도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이 질서가 바로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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