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30)-에셀 나무의 꿈(창세기 21:22-34)



창세기 강해(30)-에셀 나무의 꿈(창세기 21:22-34)

이 내용은 송태근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
30번째, 에셀나무의 꿈
의 설교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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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셀나무의 꿈

오늘 말씀의 제목은 에셀나무의 꿈이에요.
이 본문은 창세기 가운데서도 비교적 자주 다뤄지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요.

우리는 지난 시간에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여 위험에 빠뜨렸던 사건과, 이후 그랄 땅에서 아비멜렉 앞에서도 비슷한 일을 반복했던 사건을 살펴보았어요. 겉으로 보면 거의 복사판처럼 보이는 두 사건이지만, 성경은 이 두 이야기를 통해 전혀 다른 초점을 보여주고 있어요.

창세기 12장의 사건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세상에 드러내는 이야기였다면,
오늘 우리가 보는 창세기 21장의 사건은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미화하지 않아요. 아브라함의 연약함과 실수, 추함까지도 숨기지 않고 그대로 기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연약한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가세요.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창세기 21:22)

이 말씀을 들으면 마치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는 장면처럼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이 고백은 단순한 칭찬이나 축복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에 들어와 산 지는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흘렀어요. 그동안의 삶을 지켜본 이방 왕과 군대 장관의 눈에 분명하게 보였던 것이 있었던 거예요.
“아, 이 사람과 함께하는 분이 따로 계시는구나.”

마치 요셉을 바라보던 애굽 사람들처럼 말이에요. 요셉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시는 것을 온 세상이 보았던 것처럼, 아브라함의 삶에서도 같은 증거가 드러났던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속에서 어딘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어요.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계산적으로 맞지 않아 보이는 삶을 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나그네인데 갑이 된 사람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창세기 21:23)

이 장면은 굉장히 역설적이에요.
아비멜렉은 이 땅의 왕이고, 아브라함은 흘러들어온 나그네입니다. 원리적으로 보면 아비멜렉이 ‘갑’이고 아브라함은 ‘을’이에요.

그런데 실제 상황은 정반대입니다.
왕이 나그네에게 와서 맹세를 요구하고 있어요.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으로 보면 답이 분명해져요.
이 땅의 진짜 왕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백성은 현실적으로는 세상 속에 매여 살아가지만, 영적인 정체성은 왕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성도는 을의 자리에 있어도 갑처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물 사건과 영적인 무지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창세기 21:25)

아브라함은 그동안 겪어왔던 억울한 일을 이 자리에서 꺼내놓습니다.
우물을 빼앗긴 사건이에요.

우물은 중동 지역에서 생명줄과 같은 존재입니다.
나그네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어요.

“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
(창세기 21:2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비멜렉이 정말 몰랐다는 사실이에요.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영적인 무지입니다.

세상은 몰라서 하나님의 백성을 상처 주고, 빼앗고, 오해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처럼 말이에요.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래서 성도의 역할이 필요해요.
말로 알려주고, 삶으로 보여주는 역할 말이에요.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진리를 드러내는 책임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요.



언약과 대가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창세기 21:27)

여기서 사용된 언약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베리트입니다.
일방적이고, 반드시 성취되는 신실한 언약을 의미해요.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창세기 21:28–30)

이 일곱 암양은 우물의 소유권을 확정하는 증표입니다.
아브라함은 값을 치르고 우물을 얻어요.

이 장면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심으로 생명의 우물을 열어주신 사건 말이에요.



브엘세바, 맹세의 우물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창세기 21:31)

브엘은 ‘우물’, 세바는 ‘일곱’이자 ‘맹세’를 뜻해요.
그래서 브엘세바는 맹세의 우물입니다.

이 우물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걸고 세우신 언약을 예표합니다.



에셀나무를 심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창세기 21:33)

에셀나무는 사막에서도 살아남는 나무입니다.
뿌리가 깊어 지하의 수분을 끌어올리기 때문에 척박한 땅에서도 크게 자랍니다.

유대인들은 나그네를 환대하기 위해 마을마다 에셀나무를 심었어요.
“여기에는 쉼이 있다”는 선언이었죠.

아브라함이 에셀나무를 심었다는 것은 단순한 조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예배가 시작돼요.



에셀나무 아래에서

“사울이… 에셀나무 아래에 앉았고”
(사무엘상 22:6)

“그의 뼈를 가져다가… 에셀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사무엘상 31:13)

이스라엘 왕국의 통치는 에셀나무 아래에서 시작되고,
또 그 자리에서 마무리됩니다.

아브라함이 심은 에셀나무는 훗날 왕국의 시작점이 되었어요.



오늘, 우리가 심어야 할 에셀나무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때로 아무 의미 없어 보일 수 있어요.
실수투성이이고, 실패도 많고, 세상 기준으로 보면 초라해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한 걸음씩 순종하며 걸어갈 때,
그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가 심어집니다.

브엘세바, 생명의 우물 곁에서
에셀나무는 자라기 시작합니다.

십자가라는 가장 처절한 실패처럼 보였던 사건이
2000년이 지나 수많은 생명을 살린 것처럼 말이에요.

오늘도 우리는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에서
에셀나무를 심습니다.

마르지 않는 생명의 우물 곁에,
모든 이들이 쉼을 얻을 수 있는 나무를 심는 것.

그것이 이 시대의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라고 믿어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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