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48) 며느리의 승리 (창세기 38:1-11)

창세기 강해(48) 며느리의 승리 (창세기 38:1-11)

이 글은 송태근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
48번째 며느리의 승리라는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 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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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이야기 한가운데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창세기 38장은 참 난처한 장이에요.
내용도 난해하고, 이야기의 위치도 굉장히 어색해 보이는 장입니다.

창세기 37장 마지막 절은 이렇게 끝나죠.

“그 미디안 사람들이 요셉을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요셉이 형들의 음모에 걸려 애굽으로 팔려가는 장면에서 이야기가 뚝 끊깁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려면 바로 39장 1절로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그런데 성경은 여기서 갑자기 방향을 틀어,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의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그것도 아주 상세하게, 불편할 정도로 구체적으로 기록합니다.

왜일까요?
왜 요셉 이야기 한가운데, 이 낯설고 불편한 이야기를 끼워 넣었을까요?



요셉의 이야기는 ‘야곱의 족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어요.
요셉의 이야기는 단독 서사가 아니라, 야곱의 톨레도트, 즉 야곱의 족보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분량만 보면 요셉이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실은 요셉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은 야곱이라는 인간, 죄인, 언약의 계보 전체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38장은 그 야곱 가문의 죄인 됨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절정의 장면이라고 볼 수 있어요.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38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때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놀랍게도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가장 먼저 아버지의 집을 떠난 사람이 유다입니다.
그는 점점 가나안 땅 깊숙이 들어가요.

이때의 가나안은 약속의 땅으로 정결해진 땅이 아니라,
우상숭배와 이방 신화, 타락한 종교와 문화로 가득한 땅이었습니다.

유다는 그 땅에서 히라라는 가나안 친구를 사귀게 되고,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라는 표현처럼, 단순한 교제가 아니라 문화와 가치관, 종교까지 깊이 스며드는 관계를 맺게 됩니다.



가나안 여인과의 결혼

유다는 결국 가나안 여인과 결혼합니다.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이 결혼은 단순한 혼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였던 유다의 삶 한가운데에 가나안의 가치관이 깊숙이 들어왔다는 신호입니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태어납니다.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니라.”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그러나 장자 엘에게 충격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성경에서 하나님이 직접 사람을 쳐서 죽이시는 장면이 여기서 처음 등장합니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아요.

다만 이어지는 오난의 행동과 죽음을 보면,
이 집안에 성적인 타락과 깊은 연관성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유다는 둘째 아들 오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이는 훗날 신명기 25장에 명시되는 계대혼인법과 같은 개념입니다.
씨가 끊어지지 않도록 가문을 잇는 것이 고대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문제였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오난은 이 법을 철저히 계산적으로 거부합니다.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리고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함으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유다의 두려움

이제 남은 아들은 막내 셀라 하나입니다.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 말합니다.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겉으로는 책임 있는 말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유다의 속마음을 이렇게 밝힙니다.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언약의 계보가 끊길 위기 앞에서,
유다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두려움에 붙잡혀 결정을 미룹니다.

세월이 흘러도 셀라는 다 자랐지만,
다말에게는 아무 소식도 오지 않습니다.

그 사이 유다는 여전히 히라와 함께하며 가나안 문화에 깊이 젖어 있습니다.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양털을 깎는 시기는 단순한 노동의 시기가 아니라,
축제와 향락, 그리고 이방 신전 숭배가 결합된 시기였습니다.



다말의 언약에 대한 몸부림

다말은 결단합니다.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에나임은 ‘눈이 열리다’는 뜻의 장소지만,
이곳에서 유다는 눈이 닫혀 며느리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담보물로 도장과 끈, 지팡이를 맡기고 관계를 맺습니다.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그는 나보다 옳도다

임신 사실이 드러나자 유다는 분노합니다.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그러나 다말은 담보물을 내보이며 말합니다.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그때 유다의 입에서 이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이 말은 ‘도덕적으로 옳다’는 뜻이 아닙니다.
언약의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집요한 소망이 옳았다는 고백이에요.



그리스도의 계보

다말은 쌍둥이를 낳습니다.

“해산할 때에 보니 쌍태라”

먼저 나온 것 같았던 손이 들어가고,
뒤에 있던 아이가 먼저 나옵니다.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이름을 베레스라 하였더라”

그리고 성경은 이 베레스의 계보를 따라갑니다.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마침내 마태복음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옳음의 정의

오늘 창세기 38장이 말하는 ‘옳음’은 이것입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께 소망을 걸고, 은혜에 인생을 맡기는 태도예요.

다말은 이방 여인이었지만,
언약이 끊어질 위기 속에서 끝까지 그 자비를 붙들었습니다.

그 집요함을 통해,
왕 중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이어졌습니다.

그것이 옳은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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