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59) 나도 안다! (창세기 48:1-22)

이 일 후에
창세기 48장은 “이 일 후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표현은 지금부터 전개될 이야기가 앞장의 사건과 분명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그 앞장에는 어떤 중요한 일이 있었을까요?
바로 야곱의 마지막 요청, 그의 유언과도 같은 부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야곱이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주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백사십칠 세라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
(창세기 47:27–31)
야곱은 분명히 말합니다.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말라.”
이는 단순한 장례 장소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의 요청은 하나님의 언약을 끝까지 붙들겠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내가 조상들처럼 눕거든, 임시로는 애굽에 둘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출애굽의 때가 이르면
반드시 나의 유골을 가나안 땅으로 옮겨 달라.”
야곱의 시선은 이미 죽음 이후,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완성될 미래를 향해 있었습니다.
급히 달려온 요셉
이제 창세기 48장 1절로 넘어옵니다.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창세기 48:1)
이 '어떤 사람'이란 단어로 야곱과 요셉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 알수 있어요.
야곱은 고센 땅에 있고, 요셉은 애굽 궁궐에서 총리의 직무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거리상 떨어져 있었기에 누군가가 중간에서 소식을 전했을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 “어떤 사람”을
간병인 혹은 호위병, 또는 관리로 추정합니다.
총리의 아버지라면 그 정도 배치는 충분히 상식적이죠.
그리고 2절에서도 같은 표현이 반복됩니다.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창세기 48:2)
아들이 왔다는 말 한마디에,
기력이 쇠한 야곱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습니다.
죽음을 앞둔 노부모에게 자식은 여전히 큰 힘입니다.
요셉 역시 바쁜 국정 가운데서도
아버지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자
두 아들을 데리고 즉시 달려옵니다.
이 장면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해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의 나라 역사에서 결정적인 장면이 됩니다.
벧엘의 하나님
야곱은 침상에 앉자마자 요셉에게 말합니다.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창세기 48:3)
루스는 벧엘의 옛 이름입니다.
야곱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가장 외롭고 두려웠던 밤을 기억해냅니다.
외삼촌 집으로 도망치듯 떠나던 길,
돌을 베고 노숙하던 그 밤,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이어집니다.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창세기 48:4)
숨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
야곱이 붙드는 것은 재산도, 성공도, 성취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는 더 이상
욕망과 계산으로 살던 옛 야곱이 아닙니다.
흔들리지 않는 가치관
야곱은 앞장에서 애굽의 바로를 축복합니다.
이는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분명한 신앙의 태도입니다.
그는 세상 최고의 권력 앞에서도
위축되지도, 열등감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관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평생의 고난과 실패를 통해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인생은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대로는 반드시 된다.”
만약 인생이 우리의 계획대로만 흘러갔다면
우리는 진작에 더 깊은 수렁에 빠졌을지도 모릅니다.
야곱은 이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인생의 싸움의 방향을 바꿉니다.
수단의 싸움에서 → 의지의 싸움으로
의지의 싸움은 곧 순종입니다.
내 것이라
이제 본문의 핵심 장면으로 들어갑니다.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창세기 48:5)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선언합니다.
이는 단순한 입양이 아닙니다.
언약의 혈통에 편입시키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원래 장자는 므낫세인데,
야곱은 에브라임을 먼저 부릅니다.
히브리 문화에서 이름의 순서는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의도적인 선언이에요.
요셉에게 이것은
마음 깊이 자리한 염려가 뿌리째 뽑히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방 땅에서 낳은 자녀들이
과연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
그 근심이 해소됩니다.
라헬의 이름이 다시 불리는 이유
야곱은 갑자기 라헬 이야기를 꺼냅니다.
“라헬이 나를 따르는 도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
(창세기 48:7)
이는 단순한 회상이 아닙니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문학적 장치입니다.
평생 가장 사랑했던 여인,
요셉과 베냐민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누구냐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이르되
이들은 누구냐”
(창세기 48:8)
이렇게 물었던 야곱을 모습을 두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눈이 어두워서
둘째, 족장이 공식적인 축복을 선포하기 전 묻는 당연한
절차상 물음.
실제로 눈이 어두웠고,
동시에 공식적인 선언을 위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요셉의 대답이 중요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창세기 48:9)
요셉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그의 언어 속에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엇갈린 손
마침내 축복의 순간이 옵니다.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창세기 48:14)
요셉은 놀라 손을 바로잡으려 합니다.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창세기 48:18)
그러나 야곱은 단호히 말합니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창세기 48:19)
이것은 실수가 아닙니다.
야곱은 알고 있었습니다.
과거 이삭은 속았지만,
이제 야곱은 속지 않습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분별하는 눈을 얻었습니다.
열두 지파의 완성
이로써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야곱의 아들로 편입됩니다.
그 결과 무엇이 완성됩니까?
열두 지파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요셉은 족보상 아버지와 동격이 됩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리스도의 예표로 불립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열두 지파가 세워지고,
그 위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집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야곱은 더 이상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가장 부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실수 속에서도 일하시고,
더더욱 순종 위에서는
그 언약을 확고히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