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13. '예수님의 특별한 여행'
예수님의 특별한 여행
사람마다 평생 잊지 못할 특별한 여행이 하나쯤 있습니다.
어떤 여행은 풍경 때문이 아니라 그 의미 때문에 기억에 남습니다.
어느 날 은퇴하신 한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특별한 일정이 있는지 물으시더니, 일정이 없다고 하니 “나와 함께 어디 좀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따라 나선 여행이었습니다.
도착한 곳은 전라남도 땅끝 근처의 작은 항구였습니다. 그곳에서 ‘방주호’라는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배의 선장은 다리를 조금 불편하게 쓰시는 목사님이었습니다. 파도가 거칠어 정말 죽을 뻔한 순간도 있었지만 결국 작은 섬에 도착했습니다.
그 섬의 이름은 마삭도였습니다. 그곳에는 단 다섯 가구만 살고 있었습니다. 교회도 없고 목회자도 없는 섬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려면 배를 타고 육지로 나와야 했고, 날씨가 나쁘면 예배조차 드리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배를 구입해 ‘방주호’라고 이름 붙이고 섬들을 돌아다니며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섬에는 주일이 따로 없습니다. 배가 들어오는 날이 주일입니다.
다섯 가구가 모여 예배를 드렸던 그 여행은 잊을 수 없는 특별한 기억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행로 역시 바로 그런 “특별한 여행”입니다.
유대를 떠나신 예수님
요한복음 4장은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는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지나가는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1절과 2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당시 사람들 사이에 잘못된 소문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예수님이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이 소문을 바리새인들이 들었고, 그 사실을 예수님도 들으셨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한 가지를 느끼셨습니다.
“이들이 벌써부터 나를 경계하고 있구나.”
유대 사회에서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결단을 내리십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요한복음 4:3)
이 표현은 단순히 장소 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 “떠나사”라는 말은 의지적인 결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유대 땅을 포기하고 새로운 행로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이 유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한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반드시
성경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요한복음 4:4)
여기서 “하여야 하겠는지라”는 헬라어 원문에서 “must”라는 의미입니다.
즉, 반드시 지나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리적으로 보면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려면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절대로 사마리아를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깊은 역사적 갈등 때문이었습니다.
사마리아 비극적인 역사
기원전 약 750년경, 앗수르 제국이 북이스라엘을 정복했습니다.
앗수르는 매우 잔혹한 정책을 사용했습니다.
포로를 끌고 가는 것뿐 아니라 혈통을 없애기 위해 강제로 혼인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방 민족과 결혼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 정책 때문에 두 부류가 생겨났습니다.
- 신앙과 혈통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저항한 사람들
- 생존을 위해 이방인과 혼인하게 된 사람들
세월이 흐른 뒤 앗수르가 망하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혈통을 지킨 사람들은 정통 유대인이 되었고
혼혈이 된 사람들은 사마리아인이라 불리며 철저한 차별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개와 돼지처럼 취급했고, 사마리아 땅을 밟는 것조차 꺼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이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차별과 편견에 대한 거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야곱의 우물에 도착한 예수님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마을에 도착하십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요한복음 4:5)
이 땅의 배경은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창세기 33:19)
야곱이 가나안에 돌아와 처음 정착한 곳이 바로 세겜입니다.
그 땅을 나중에 요셉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요한복음 4:6)
여기서 “그대로 앉으시니”라는 표현은 단순히 앉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이 털썩 주저앉는 모습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긴 여행 끝에 찾아야 할 한 영혼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도착하신 것입니다.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
그때 한 여인이 물을 길으러 옵니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요한복음 4:7)
여인은 놀라며 말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요한복음 4:9)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말도 섞지 않는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한복음 4:10)
여기서 예수님은 생수(living water)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우물과 샘의 차이
성경은 “우물”이라고 번역하지만 원문에서는 “샘”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물과 샘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물은 사람이 파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샘은 사람이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4:13–14)
즉, 예수님은 자신이 샘의 근원이심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생수의 의미
성경은 이 생수가 무엇인지 분명히 설명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한복음 7:37–39)
즉, 생수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이 장면은 구약의 예언과도 연결됩니다.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더라”
(에스겔 47:1)
그리고 마지막 날 이렇게 성취됩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요한계시록 21:6)
또한 이사야 선지자도 이미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호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사야 55:1)
참된 예배란
대화는 결국 예배의 주제로 이어집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묻습니다.
예배는 그리심 산에서 해야 하는가,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해야 하는가.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한복음 4:2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4:24)
참된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배는 성령 안에서 드리는 삶 전체의 예배입니다.
성령이 역사하면 죽었던 삶이 살아나고
죄에 묶였던 사람이 자유를 얻으며
메마른 인생에 회복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여행의 의미
예수님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
유대를 떠나
사마리아를 지나
수가성 우물가까지 오셨습니다.
그 긴 여행의 목적은 단 하나였습니다.
목마른 한 영혼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사실 우리 모두를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목마른 인생
채워지지 않는 삶
끊임없이 우물물을 길어야 하는 인생
그 인생을 찾아 참 신랑 되신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분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 생수의 은혜가 한 주를 살아가는 삶 속에서
회복과 치유의 역사로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