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46. 부활의 세 가지 얼굴

1. 아직 어두울 때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요한복음 20:1)
요한복음은 부활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표현은 주일, 곧 새로운 날이 밝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영적인 인식은 여전히 어두운 상태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이미 일어났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인간의 내면은 아직 ‘맹아적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이 장면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보다’입니다. 보고, 보았으나, 보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이 본문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2. 막달라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았더라”
막달라 마리아는 이름이 아니라 출신지에서 붙여진 호칭입니다. 수많은 ‘마리아’ 가운데서도 사복음서가 공통적으로 기록한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만큼 그녀는 부활 사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오해하지만, 이는 역사적 혼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실제 성경은 그녀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 (마가복음 16:9)
그녀는 귀신 들렸던 과거에서 완전히 치유받고, 예수님을 진실하게 따르는 제자가 된 인물입니다. 인생의 주인이 바뀐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본 그녀의 상실감은 누구보다 깊었을 것입니다.
3. 여전히 ‘시신’을 찾는 믿음의 한계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나이다”
막달라 마리아의 말에는 중요한 인식이 담겨 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예수님을 ‘살아계신 주님’이 아니라 ‘어딘가에 옮겨진 시신’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을 맞이한 첫 번째 상태입니다. 사건은 일어났지만, 믿음은 아직 그 의미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4. 베드로와 요한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곧바로 무덤으로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요한복음 20:3-4)
여기서 ‘다른 제자’는 요한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자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이렇게 표현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눈에 띄는 것은 두 사람이 함께 달리지만 속도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그림에서도 보이듯이 요한은 더 젊었고, 베드로는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먼저 무덤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그 다음 행동입니다.
요한은 먼저 도착했지만,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몸을 굽혀 들여다보기만 합니다. 반면에 뒤이어 도착한 베드로는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무덤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 모습은 두 제자의 성향을 잘 보여줍니다. 요한은 섬세하고 신중한 반면, 베드로는 즉각적이고 행동 중심적인 사람입니다.
결국 요한도 뒤따라 들어가게 됩니다.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요한복음 20:8)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아직 완전한 부활 신앙이 아닙니다. 단지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상태일 뿐입니다.
이 장면은 매우 인간적인 믿음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같은 사건을 경험해도 사람마다 반응이 다르고, 이해의 속도도 다릅니다.
누군가는 먼저 도착하고, 누군가는 뒤따라옵니다. 누군가는 머뭇거리며 바라보고, 누군가는 곧바로 뛰어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두 사람 모두 결국 ‘빈 무덤’ 앞에 서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부활은 이미 일어났지만, 아무도 그것을 부활로 이해하지 못하는 ‘영적 어둠’의 상태였습니다.
5. 부활의 첫 번째 얼굴
➡ 울고 있는 신앙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요한복음 20:11)
빈 무덤 앞에서 마리아는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이 울음은 존재가 무너지는 절망의 울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삶을 얻었던 그녀에게, 그분의 죽음은 곧 자신의 삶이 다시 무너지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부활의 첫 번째 얼굴입니다. 부활의 사건 앞에 서 있지만, 여전히 슬픔과 상실 속에 머물러 있는 신앙입니다.
6. 부활의 두 번째 얼굴
➡ 보고도 알지 못하는 신앙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을 알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20:14)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시각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입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은 그녀에게 질문하십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여전히 그분을 동산지기로 오해합니다.
이 장면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그대로 비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예배를 드리며, 기도를 하지만, 정작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보고 있으나 보지 못하는 상태, 이것이 부활의 두 번째 얼굴입니다.
7. 깨달음이 시작되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예수님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시는 순간, 상황이 바뀝니다.
“라보니!” (선생님)
이 짧은 호칭 안에는 깊은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부르심을 통해, 마리아의 영적인 눈이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인식하는 순간은 언제나 말씀과 함께 찾아옵니다.
8. 부활의 세 번째 얼굴
➡ 보내심 받은 신앙으로
“나를 붙들지 말라” (요한복음 20:17)
접촉을 금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이전과 같은 방식, 육적인 관계로만 이해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마리아는 여전히 ‘곁에 두고 싶은 예수님’을 붙들려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이제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이 순간, 마리아는 ‘보냄 받은 증인’이 됩니다.
이것이 부활의 세 번째 얼굴입니다. 붙들려는 신앙에서, 전하는 신앙으로 변화되는 순간입니다.
9. 부활의 증언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요한복음 20:18)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성은 증인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가장 먼저 이 여인을 부활의 증인으로 세우셨습니다.
이 사실은 오히려 부활 사건의 진실성을 더욱 강하게 드러냅니다. 만약 꾸며낸 이야기였다면, 결코 이런 방식으로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인간의 기준을 넘어섭니다.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10. 말씀으로 열리는 부활의 눈
마리아가 주님을 알아본 순간은 ‘이름을 들었을 때’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말씀을 통해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부활 신앙은 감정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열리는 영적인 깨달음입니다.
11. 부활은 새로운 사명의 시작
부활은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마리아는 부활을 경험한 순간, 곧바로 증인의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그저 아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반드시 ‘전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부활의 세 가지 얼굴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울고 있는 신앙, 보지 못하는 신앙, 그리고 보내심 받은 신앙.
이제 우리는 세 번째 얼굴로 나아가야 합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삶, 그것이 부활을 진짜로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