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12. 요한의 기쁨 (요한복음 3:22-30)

예수님의 세례?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 요한복음 3:22
이 구절만 보면 마치 예수님께서 직접 세례를 베푸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4장으로 넘어가면, 이 표현이 사람들의 이해 방식에 따른 기록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 요한복음 4:1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 요한복음 4:2
즉 실제로 세례를 베푼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제자들이 행한 일을 예수님이 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래서 본문도 그런 방식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 22절은 예수님의 이름 아래 이루어진 세례 사역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가까운 애논에서
이어서 본문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소개합니다.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 요한복음 3:23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내용보다 본문의 구조입니다. 사복음서를 보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함께 소개하긴 하지만, 이처럼 두 사람의 사역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장면으로 배치한 것은 요한복음이 거의 유일합니다.
왜 요한은 굳이 이렇게 기록했을까요? 왜 예수님의 세례 사역과 세례 요한의 세례 사역을 같은 지역 안에서, 그것도 가까운 거리 속에 나란히 놓았을까요?
이것은 단순한 배경 설명이 아닙니다. 이 구조 속에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요한은 지금 이전 시대가 물러가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전환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그런데 본문은 갑자기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 요한복음 3:24
처음 읽으면 다소 뜬금없는 문장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사실 이 짧은 한마디는 매우 중요한 분기점을 설명합니다.
성경 전체의 흐름을 보면, 예수님의 본격적인 공적 사역은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힌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납니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히게 된 이유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당시 왕이었던 헤롯의 죄를 정면으로 지적했습니다. 헤롯이 자기 동생의 아내를 취한 왕궁의 추악한 스캔들을 공개적으로 책망한 것입니다. 결국 그 일로 인해 요한은 체포되었고, 나중에는 참수형까지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단순한 시간 설명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사역이 아직 공식적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사역이 곧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라고 불립니다.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수천 년 동안 구약의 선지자들은 오실 메시아를 예언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긴 예언의 행렬 끝에서 마지막 바통을 잡은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메시아를 가장 가까이에서 소개한 마지막 증인입니다. 그의 사역은 감옥에서 마감되고, 그 지점부터 예언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전면에 등장하십니다.
해가 떠오르면 달빛은 사라집니다. 세례 요한의 역할도 바로 그러했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벌어진 원조 논쟁
이제 본문 속에서 실제 문제가 벌어집니다.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 요한복음 3:25
여기서 말하는 정결예식은 문맥상 분명히 세례를 가리킵니다. 왜 이런 논쟁이 생겼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세례를 베풀고 있었고, 세례 요한도 가까운 곳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매우 비슷한 사역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납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조금씩 예수님께로 옮겨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요한복음 1:36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 요한복음 1:37
원래 세례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세례 요한의 증언을 통해서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세례 사역은 점점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 요한복음 4:1
이쯤 되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 입장에서는 마음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는 원래 세례 요한이 먼저 시작한 사역입니다. 예수님조차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말하자면 ‘원조’는 세례 요한 쪽입니다. 그런데 후발주자인 예수님의 사역이 더 인기를 얻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연히 제자들 안에는 불편함이 생깁니다. “왜 하필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같은 사역을 하지?” “왜 사람들은 점점 저쪽으로 가는 거지?” “도대체 어느 쪽이 진짜인 거지?” 이런 감정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 감정은 시기와 불편함, 비교의식으로 이어집니다.
요한의 제자들의 불편한 질문
그 마음은 결국 이런 말로 터져 나옵니다.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 요한복음 3:26
이 말은 단순한 보고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서운함도 있고, 억울함도 있고, 은근한 문제 제기도 담겨 있습니다. “선생님이 증언해 주셨던 바로 그 사람에게 지금 사람들이 다 가고 있습니다”라는 말은, 결국 “이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혼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앞 절에서 정결예식에 대한 변론이 일어난 것입니다. 세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진짜 권위가 어디에 있는지, 지금 누구의 사역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생긴 것입니다.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이때 세례 요한은 아주 선명하고도 놀라운 답을 내놓습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 요한복음 3:27
이 한마디가 오늘 본문의 중심입니다.
세례 요한은 먼저 자신의 사역을 이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감당해 온 사명도 하늘에서 주신 것이 아니면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역할과 내 사역과 내 자리도 모두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이며, 그것이 여기까지라면 여기까지가 맞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말은 예수님에게도 적용됩니다. 지금 점점 더 흥하고 있는 예수님의 사역 역시 하늘에서 주신 것이기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사역이 잘되는 것을 두고 시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능력이나 경쟁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권한과 때에 따라 드러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인식이 없으면 공동체는 금방 비교와 시기 속으로 들어갑니다. “왜 나는 안 되지?” “왜 저 사람은 잘 되지?” “왜 저 사역은 더 드러나지?” 이런 마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그러나 모든 사명이 하늘에서 주어진 것임을 알게 되면, 비교는 멈추고 평안이 시작됩니다.
뒤늦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일
이 부분은 요셉의 이야기와도 닮아 있습니다. 요셉은 인생의 많은 시간을 억울함 속에서 지나갔습니다. 형들에게 팔리고, 종이 되고,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면서 그는 자기 삶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형들이 애굽에 와서 자기 앞에 엎드리는 장면을 본 순간, 비로소 지난 세월의 조각들이 하나로 맞춰지기 시작합니다.
그때 요셉은 깨닫습니다.
“아,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구나.”
그 사실 앞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는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형들의 악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요셉은 용서할 수 있었고, 원망보다 하나님의 손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도 바로 그런 눈을 가졌습니다. 그는 자기 역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자리의 경계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흥하시는 것을 보며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세례 요한은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합니다.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 요한복음 3:28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한이 단순히 자기 정체성을 밝히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제자들에게도 분명히 말합니다. “너희가 그 증인이다.” 다시 말해, 너희도 내 역할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메시아가 아니다. 나는 주인공이 아니다. 나는 오직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나는 드러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분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흔들리지 않을 때, 사람은 자기 자리를 평안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신랑의 친구라는 비유
이어지는 29절은 당시 유대 결혼 문화를 알아야 더 또렷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 요한복음 3:29
유대인의 결혼은 두 단계로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정혼이 있었습니다. 정혼이 끝나면 이미 법적으로는 부부였지만, 신랑과 신부는 함께 살지 않았습니다. 신랑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감독 아래 신부를 데려와 살 집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이 되면 아버지가 그 시점을 정해 신랑을 보내 신부를 데려오게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이 바로 쇼쉬벤(Shoshben)이라고 하는 신랑의 친구입니다. 유대 전통에서는 이 역할을 특별히 맡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신부를 신랑에게 잘 인도하고, 마지막까지 결혼의 기쁨이 제대로 완성되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신랑의 기쁨이 확인되었을 때 함께 기뻐하며 자기 임무를 마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바로 그 신랑의 친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지 친구가 아닙니다. 친구의 기쁨은 자신이 주목받는 데 있지 않고, 신랑이 드러나고 신랑의 기쁨이 완성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이 말은 억지로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닙니다. 진짜 자기 자리를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세례 요한의 고백은 결국 이 한 문장으로 정리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 요한복음 3:30
이것은 패배자의 말이 아닙니다. 밀려난 사람의 체념도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 사명이 끝나 가는 것을 보며 낙심하는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자기 역할을 완전히 이해한 사람의 기쁨 어린 선언입니다.
세례 요한은 사라지는 것을 실패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가 드러나기 위해 자신이 뒤로 물러나는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해가 떠오를 때 새벽별이 사라지는 것은 비참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자리를 다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퇴장은 아름답습니다. 그는 자기 이름이 남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고, 자기 영향력이 계속 유지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더 또렷하게 드러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
우리는 종종 은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기쁨과 은혜의 기준이 너무 자주 자기 중심적일 때가 있습니다. 내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기쁘고, 내 결핍이 채워졌기 때문에 감사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풀렸기 때문에 은혜라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물론 그런 감사도 귀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보여주는 기쁨은 그보다 더 깊은 차원의 기쁨입니다. 그의 기쁨은 자기 사역의 성공에서 오지 않았습니다. 자기 이름이 높아진 데서 오지 않았습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 그것이 그의 기쁨의 실체였습니다.
그래서 이 기쁨은 세상이 이해하기 어려운 기쁨입니다. 내가 작아져도 기쁘고, 내가 사라져도 기쁘고, 내가 주목받지 않아도 기쁜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겸손은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태도가 아닙니다. 겸손은 내게 일어난 일을 두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기 삶의 모든 흐름을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옳은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언제나 옳습니다.
이 인식이 들어올 때 사람은 덜 흔들리고, 덜 비교하고, 덜 다투게 됩니다.
세례 요한의 평안은 바로 여기서 왔습니다.
“내 사역은 여기까지구나.”
“그분은 이제 드러나셔야 하는구나.”
“이 모든 것은 하늘에서 주신 것이구나.”
그가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제자들처럼 시기하지 않았고, 비교하지 않았고, 억울해하지 않았습니다.
신랑이 높아지는 기쁨의 회복
오늘 본문은 단지 세례 요한의 아름다운 퇴장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우리 자신의 신앙을 비추어 보게 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잘될 때 기쁜 사람입니까?
내가 드러날 때입니까?
내 사역이 인정받을 때입니까?
내 자리가 더 커질 때입니까?
아니면 정말로 그리스도가 높아질 때 기쁜 사람입니까?
세례 요한은 신랑의 친구로 살았습니다. 그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을 보고 기쁨으로 충만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말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 요한복음 3:30
이 고백이야말로 성숙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내가 희미해져도, 작아져도, 사라져도 괜찮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고백입니다.
전쟁터 같은 삶의 현장 속에서도 이 기쁨을 다시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만족이 채워지는 기쁨을 넘어서,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높아지시는 기쁨을 아는 한 주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