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43. 세 개의 시선

1. 새벽, 재판의 무대가 바뀌는 순간
오늘 본문은 장소의 전환으로 시작됩니다. 가야바의 뜰에서 빌라도의 관정으로, 무대가 바뀌는 이 장면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한 유대식 재판이 이루어졌다면, 이제는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로마식 재판이 진행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단순한 종교적 사건을 넘어, 온 세상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사건임을 보여주는 전환점입니다.
특별히 이 재판이 이루어진 시간은 ‘새벽’입니다. 새벽은 어둠이 가장 짙은 마지막 순간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경계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 속에서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죽음 너머에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2. 아이러니한 종교적 열심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러움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예수님을 끌고 온 유대인들은 관정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더러움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공간에 들어가면 제의적으로 부정해진다고 여겼고, 그렇게 되면 유월절 식사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강렬한 아이러니를 발견하게 됩니다. 가장 거룩하신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넣고 있으면서, 정작 자신들은 더러워질까 봐 관정에 들어가지 않는 모습입니다. 겉으로는 거룩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큰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시선입니다. 외형적인 종교적 열심과 내면의 타락 사이의 괴리입니다.
3. 진실을 드러내는 말 한마디
“이에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유대인들이 관정 안으로 들어오지 않자, 빌라도가 직접 밖으로 나옵니다. 이 장면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총독이 재판을 위해 안과 밖을 계속 오가야 하는 상황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이 말은 그들의 숨겨진 의도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예수님을 이곳까지 끌고 온 이유는 단 하나, 죽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목적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로라”
그들의 악한 행동조차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예언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악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흔들림 없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4. 예수님의 나라, 세상과 다른 본질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며 ‘왕’이라는 표현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가 기대하는 정치적 왕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방식으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힘과 권력, 무력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은 충분히 싸워서 이 상황을 피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나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눈에 보이는 정치적 해방이 아니라, 영원한 구원을 이루는 나라입니다.
5. 진리, 그리고 그 진리에 속한 사람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를 증언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어떤 개념이나 철학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곧 진리입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통치 아래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즉, 예수님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6. “진리가 무엇이냐?”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이 질문은 진리를 갈망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비아냥에 가까운 질문입니다. 현실 속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질문과 같습니다.
“진리가 밥 먹여주냐?”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시선입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세상의 시선입니다. 진리는 눈에 보이는 유익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쉽게 그것을 무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그 진리를 위해 십자가를 향해 가고 계십니다. 진리는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7. 바라바를 선택한 사람들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바라바는 단순한 강도가 아닙니다.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더라”
그는 당시 민중에게는 일종의 혁명가, 독립운동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아니라 바라바를 선택합니다.
이 선택은 그들이 어떤 메시아를 기대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정치적이고 물리적인 해방을 가져다줄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 문제를 해결해 줄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시선입니다. 세상의 성공과 현실적인 유익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시선입니다.
8. 세 가지 시선
오늘 본문 속에는 세 가지 시선이 등장합니다. 형식적인 종교에 머무른 시선, 진리를 비웃는 세상의 시선, 그리고 현실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시선입니다.
이 세 가지 시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세상은 여전히 우리에게 묻습니다.
“진리가 정말 중요하냐?”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다시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에 속한 자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입니다.
진리는 단순한 선택지가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결정짓는 기준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한 주간도 이 진리를 붙들고,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