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26. 신의 아들 (요한복음 10:31-42)

요한복음 강해 26. 신의 아들

이 내용은 송태근 목사님의 요한복음 강해
26번째, 신의아들이란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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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종교

요한복음 10장은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갈등이 절정으로 치닫는 장면입니다. 본문은 단순히 논쟁 하나를 기록한 사건이 아닙니다. 이 장면 속에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아들이란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종교가 얼마나 쉽게 생명을 잃은 껍데기로 변할 수 있는지가 깊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 가지 배경을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는 장소인 예루살렘 성전, 둘째는 절기인 수전절, 셋째는 계절인 겨울입니다. 이 세 가지는 단순한 배경 설명이 아니라 요한복음이 의도적으로 배치한 영적 상징입니다.



수전절과 겨울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요한복음 10:22)

수전절은 모세 율법에 기록된 절기가 아닙니다. BC 167년경 헬라 제국의 폭군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힌 사건 이후, 유대인들이 성전을 다시 회복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절기입니다.

그 당시 성전 안에는 제우스 신상이 세워졌고, 유대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의 피가 성전에 뿌려졌습니다. 토라 교육도, 예배도, 할례도 금지되었습니다. 그 절망의 시대 속에서 마카비 혁명이 일어났고, 결국 유대인들은 성전을 되찾게 됩니다.

문제는 성전을 다시 정결하게 하려 할 때였습니다. 성전에는 창문이 없었기 때문에 촛불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정결한 올리브 기름이 하루치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하루치 기름이 8일 동안 꺼지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메노라의 기적이며, 그래서 수전절은 ‘빛의 절기’라고도 불립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절기에 유대인들은 참 성전이신 예수님을 돌로 치려 하고 있습니다. 빛의 절기를 지키면서 정작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서 겨울은 단순한 계절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추수가 끝난 뒤, 구원의 기회를 놓친 상태를 상징합니다. 즉, 지금 유대인들의 영적 상태는 차갑고 메마른 겨울과 같았습니다.



돌을 든 유대인들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요한복음 10:31)

이 장면을 보면 단순히 유대인들이 화가 나서 폭력을 행사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율법적 근거를 가진 종교적 의분이었습니다.

레위기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비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레위기 24:16)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하게 여기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정죄하려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요한복음 10:32)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셨고, 눈먼 자를 보게 하셨고, 죽어가던 인생들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선한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종교 체계와 율법의 형식에만 있었습니다.



종교의 가장 무서운 모습

유대인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경고가 됩니다. 종교는 본래 사람을 더 따뜻하게 만들고, 더 인간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종교가 심화될수록 오히려 사람은 차가워질 수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본질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는 것입니다.

사랑하라고 주신 율법이 누군가를 찌르는 칼이 되고, 정죄의 도구가 됩니다. 선한 행위와 생명 회복에는 관심이 없고, 규칙을 지켰느냐만 중요해집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이 바로 그런 상태였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일어난 것도 중요하지 않았고, 날 때부터 맹인이 눈을 뜬 것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왜 안식일에 했느냐”였습니다.

이것이 종교의 무서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

예수님은 유대인들과의 논쟁 속에서 시편 82편을 인용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요한복음 10:34)

이 말씀은 시편 82편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시편 82:6)

여기서 말하는 “신들”은 창조주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당시 재판관들을 가리키는 표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을 공의롭게 다스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을 상징적으로 “신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부른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재판관들은 공의를 잃어버렸습니다.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시편 82:3)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권력자들의 얼굴만 바라보며 불의한 재판을 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어둠 속으로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시편 82:5)


 

참된 하나님의 아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존재론적으로 신이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아들이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참된 인간으로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생명 대신 죽음이 들어왔고, 빛 대신 어둠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단순히 천국 티켓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참된 인간으로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진짜 경건

진짜 경건은 비인간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인간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이 있는데 손만 붙들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을 사주는 것이 참 경건입니다.

기도는 그 다음이어도 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생명을 먼저 보셨습니다. 사람을 먼저 보셨습니다. 회복을 먼저 보셨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때때로 그 본질을 잃어버립니다.

차가운 종교의 껍데기를 붙든 채, 정작 사람의 눈물과 고통에는 무감각해집니다.



참 빛을 거절한 사람들

수전절은 빛의 절기였습니다. 성전을 다시 밝힌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그들은 거절했습니다.

참 성전이신 예수님을 돌로 치려 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장면을 통해 깊은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빛의 절기를 지키면서 빛을 거부하는 사람들.

성전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참 성전을 무너뜨리려는 사람들.

그것이 바로 생명을 잃어버린 종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삶

사도행전은 우리를 이렇게 부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사도행전 17:29)

또 베드로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후서 1:4)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단순히 죄 사함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시고, 잃어버린 형상을 회복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세상적인 권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종교적 우월감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는 삶입니다.

비록 세상 기준으로는 초라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명과 연결된 삶이라면, 그 삶은 가장 영광스러운 인생입니다.



돌을 내려놓아야 할 시간

유대인들은 종교적 의분에 사로잡혀 돌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돌은 결국 참 생명이신 예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 역시 누군가를 향해 돌을 들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생명보다 옳음을 앞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사랑보다 판단을 먼저 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참된 인간으로 부르십니다. 차가운 종교의 껍데기를 벗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생명을 살리는 길로 걸어가기를 원하십니다.

그 길 끝에서 하나님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고, 죽어가던 땅에 생명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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