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28. 선교는 실패가 없다. 안 하는게 실패다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단순한 기적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갈라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어요. 같은 사건을 보고도 전혀 다른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한쪽에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무리가 생겨났고, 다른 한편에서는 예수님을 제거해야 한다는 적대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그 중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요한복음 11:45-46)
이 ‘알리니라’는 단순한 전달이 아니라, 고발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결국 종교 지도자들의 공식적인 회의를 촉발시키게 됩니다.
“이에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요한복음 11:47)
그리고 이 질문은 곧 충격적인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이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요한복음 11:53)
신앙이 아니라 정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행한 사람에게 환호하고 존경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데 왜 종교 지도자들은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했을까요?
그 이유는 신앙이 아니라 ‘정치’에 있었습니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요한복음 11:48)
여기서 ‘우리 땅’은 단순한 영토가 아니라, 성전을 의미합니다. 즉, 그들의 권력 기반이 되는 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많아지면, 민중의 기대는 자연스럽게 정치적 메시아로 향하게 됩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던 백성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구원자로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이 상황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위협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와의 충돌이 일어나면, 그들이 누리고 있던 기득권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두려움은 하나님이 아니라, 로마였습니다.
결국 그들의 선택은 신앙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계산이었습니다.
가야바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대제사장 가야바입니다.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요한복음 11:49)
가야바는 로마 정부에 의해 임명된 인물로, 종교적 권위보다 정치적 성향이 강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요한복음 11:50)
이 말은 한마디로 ‘정치적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한 사람을 제거함으로써 전체의 안정을 유지하자는 계산이었습니다.
이러한 논리는 오늘날에도 쉽게 발견됩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특정 인물을 희생시키는 구조는 시대를 초월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의도와 하나님의 계획
놀라운 것은, 가야바의 이 발언이 단순한 정치적 계산을 넘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드러내는 예언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요한복음 11:51-52)
가야바는 정치적으로 말했지만, 하나님은 그 말을 통해 구원의 계획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인간은 권력과 욕망으로 움직였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상황을 사용하여 인류를 구원하는 길을 열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깊은 아이러니입니다.
어린 양
이미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를 이렇게 드러내셨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1:29)
어린 양은 제물이며, 그 제사는 대제사장이 집례합니다.
그런데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면, 불완전한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참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제물’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강렬한 역설이 있을까요?
인간의 악한 의도 속에서도, 하나님은 어린 양을 통해 구원의 길을 완성해 가고 계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
예수님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필연적인 과정이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4)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을 때, 비로소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이 원리를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죽음을 통해 수많은 생명이 살아나게 됩니다.
선한 목자의 사랑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로 비유하셨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한복음 10:10-11)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는 가장 극적인 표현입니다.
또한 이 사랑은 특정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또 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한복음 10:16)
이 말씀은 선교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우리 밖에 있던 양들까지 포함하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빈 들과 에브라임, 죽음에서 생명으로
마지막 장면에서 예수님은 에브라임이라는 마을로 물러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시니라” (요한복음 11:54)
여기서 ‘빈 들’은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죽음의 땅을 상징합니다. 반면 ‘에브라임’은 풍성함과 결실을 의미합니다.
이 장면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죽음의 땅 끝에서 생명의 열매가 시작되는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역시 이와 같습니다. 죽음처럼 보이는 그 사건이, 결국 가장 풍성한 생명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가야바
이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가야바는 어떤 특정 인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존재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진리를 외면하고, 때로는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모습은 지금도 반복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건과 무관한 사람이 아니라, 그 현장에 있었던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어린 양의 죽음을 통해, 생명의 자리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영상을 하나 보도록 하겠습니다.